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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시 쉬었다 가세요"
The Good Movies/드라마

<아사코> _ 모든 것은 두 번 시작된다. 두 번째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by 브리즈B 2020. 3. 28.

< 아사코, 2018 >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출연: 하가시데 마사히로, 카라타 에리카, 세토 코지, 야마시타 리오, 이토 사이리

장르: 드라마 / 일본 / 로맨스, 성장, 선택

 

사라진 첫사랑 바쿠를 잊지 못하는 아사코.

바쿠와 똑같은 외모의 료헤이를 만나 

호감을 느끼지만,

아사코는 바쿠를 닮은 료헤이를 사랑하는 건지

료헤이 자체를 사랑하는 건지

혼란스럽기만 한다.

 

<아사코> 예고편

 


 

" 아사코 짚어보기 "


  "오사카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아사코(카라타 에리카)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바쿠(하가시데 마사히로)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운명 같은 둘의 만남은 바쿠가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끝난다. 2년이 지난 뒤, 오사카에서 도쿄로 온 아사코는 커피숍에서 일을 하다가 우연히 회사원 료헤이(히가시데 마사히로)를 보고 깜짝 놀란다. 바쿠와 똑같이 생긴, 다른 사람이다. 아사코는 료헤이를 몇 차례 만나면서 혼란에 빠진다."
  언뜻 줄거리만 보면 그저 청춘들의 연애 이야기로 보입니다. 하지만 <아사코>는 아사코가 운명적인 연인을 잊지 못한 채 살아가다가 그와 똑같이 생긴 남자를 만나면서 겪은 혼란감을 그려내는 이야기입니다. 아사코가 겪는 혼란감은 바쿠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생긴 상실감으로부터 생겨납니다. 도쿄에서 지진이 일어난 날 아사코는 료헤이를 만나기로 결정하고, 그렇게 연인이 된 아사코와 료헤이가 센다이 지역에서 봉사하러 가는 상황을 쭉 살펴보면 영화에서 다루는 상실감은 3·11 동일본 대지진과 관련 있어 보입니다. 영화는 지진 이후에 젊은 세대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들의 고민을 담아냅니다. 

 

※ 주의 ※

본 포스팅은 지극히 개인적인 리뷰이며 

단순히 제 의견이 틀리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것을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다소 부족하지만

다름을 근거로 한 냉정한 비판은 괜찮으며

본 리뷰에 앞서 영화 내용을 다룰 것이기 때문에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신 분들은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읽어주시기를 권장합니다.

 


 

" 흔들리는 카메라(시선) "


사진전에서 아사코와 바쿠의 첫 만남

  영화는 오프닝에서 한 번, 중간에 또 한 번 시간을 건너뜁니다. 그에 따라 이 영화를 3부 구성으로 볼 수 있죠. 1부, 그러니까 영화 오프닝 타이틀이 뜨기 전의 파트는, 아사코가 고초 시게오의 사진전을 보러 가는 씬으로 시작하여 아사코의 내레이션과 함께 끝납니다. 아사코의 내레이션으로 영화는 1부의 실질적 화자가 아사코임을 못 박은 셈이죠. 사진전에서 작품을 감상하던 아사코는 정체불명의 남자 바쿠에게 알 수 없는 묘한 끌림을 받습니다. 그녀는 저절로 바쿠의 뒤를 몰래 쫓아가죠. 바쿠가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본 순간, 두 남녀는 이상하리만큼 묘한 시선을 주고받죠. 그리고 그런 아사코에게 바쿠라는 인물은 사랑하는 사람인 동시에 전혀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타인이기도 합니다.

 

바쿠와 똑닮은 2부 속 료헤이

  오프닝 타이틀 이후 2년 남짓의 시간이 흘렀다는 자막과 함께 시작한 2부의 시작을 알리는 인물은 1부의 바쿠와 꼭 닮은 료헤이라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이후부터 영화는 한 동안 료헤이의 입장에 가깝게 서서 진행되죠. 그런 료헤이가 아사코에게 다가서려 할수록, 1부의 화자였던 아사코는 왠지 1부의 바쿠가 그랬듯 전혀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타인처럼 느껴집니다.
  1부에선 아사코가 화자이며 바쿠가 타자였다면, 2부에선 비록 바쿠와 동일인물은 아니지만 바쿠를 꼭 닮은 료헤이가 화자이며 아사코가 타자입니다. 말하자면, 1부 전체가 아사코의 입장에서 바쿠를 바라보는 하나의 거대한 숏이며, 2부 전체가 정반대로 바쿠의 분신인 료헤이의 입장에서 아사코를 바라보는 하나의 거대한 역숏인 셈이죠. 하나의 시점 숏에서 카메라는 한 인물을 대변하고 그 인물의 눈을 대신해 상대방을 바라보지만, 바로 뒤이은 역 숏에서 방금 카메라가 눈이 되어 주었던 그 인물은 타자가 되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1부에서 아사코의 내레이션이 나오는 순간만 해도 영화는 스스로 아사코의 입장이라고, 아사코를 잘 안다고 확신하는 듯했지만, 바로 뒤이은 2부에서 영화의 확신은 바로 무너져 내리고 맙니다.

 


 

" 자신을 직면한다는 것, 긴 시간동안 쌓인 고름이 터져 나오는 것 "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전작 <해피 아워>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온 친구조차도 결코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다만 노력할 뿐임을, 나아가 카메라 역시도 그 피사체인 극 중 인물들을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다만 그들과 눈을 맞출 수 있는 진심의 순간만을 끈질기게 기다릴 뿐임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이번 <아사코>에서도 하마구치 류스케는 1부에서 극 중 인물을 온전히 알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부숴버린 채 출발해서 다시금 인물들과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들을 차분히 기다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해피 아워>에서는 인물들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순간들마다 여지없이 그들의 진심이 튀어나오곤 했다면, 이번 <아사코>에서는 <해피 아워> 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그보다 빈번하게 인물들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숏들이 잦음에도 그들의 진심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느낌이 좀체 들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바쿠를 데리고 달아나는 아사코. 료헤이는 말없이 앉아있다.

  지진으로 인해 아사코와 료헤이는 재회하고, 5년이란 시간이 흐릅니다. 그 이후부터 3부가 시작됩니다. 아사코 입장의 숏과 료헤이 입장의 역숏을 거쳤으니 3부에선 다시 아사코 입장의 숏이 이어지죠. 5년이란 시간을 견뎌온 둘의 관계는 바쿠의 재등장으로 인해 산산조각 나고, 바쿠와 함께 차를 타고 갈 때 아사코는 말합니다. 그동안 내내 꿈을 꾼 것 같다고. 자신이 많이 자란 줄 알았는데 눈을 떠 보니 그대로였다고. 결국 아사코는 스스로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살아온 것입니다.

 

마야가 참여하는 연극을 보러온 료헤이

  이는 료헤이 역시 마찬가지죠. 앞선 2부에서 료헤이는 아사코를 다시 만나기 위해 마야가 배우로 참여하는 헨리크 입센의 <들오리> 연극 공연을 보러 간 바 있습니다. <들오리>는 총에 맞은 들오리와도 같은 상황에서 인물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의도로 진실을 파헤친 결과 오히려 파국에 이르게 되는 결말로 끝납니다. 료헤이는 아사코가 공연 시간을 바꾸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그냥 그 공연을 보기로 하죠. 그렇지만 지진으로 인해 공연은 취소되고 맙니다. 공연장 밖으로 나왔을 때 <들오리> 공연 홍보 포스터가 엎어진 것을 본 료헤이는 그 포스터를 똑바로 세우는 대신 옆으로 눕혀 놓죠. <들오리> 공연을 무사히 보았다면 료헤이는 아사코가 바쿠를 아직 잊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낳을 파국을 미리 예상하고 아사코와 재회하지 않았겠죠. 그러나 대지진은 료헤이가 자신의 미래를 엿볼 기회를 박탈한 채로 아사코와 재회하게 합니다. 결국 료헤이 역시 아사코라는 타인을 이해하지 못한 것뿐만 아니라 아사코라는 타인에 의존해 있던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지 못한 채 5년을 지내온 것이죠.

 

고초 시게오 사진전을 보러온 아사코와 료헤이

  앞서 1부와 2부의 관계를 숏-역숏 관계라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애초에 두 명 이상의 인물이 전제되지 않는 경우 숏-역 숏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사코와 바쿠가 처음 같이 감상한, 그리고 아사코와 료헤이가 같이 감상하게 되는 고초 시게오의 사진들도 모두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아를 돌아보는 듯한 사진들이죠. 사진전의 표제부터 <SELF & OTHERS>라고, 자아와 타자들이라는 주제를 담습니다. 영화는 이처럼 타인에 의존하는 자신의 모습을 계속해서 강조하죠. 쿠시하시가 마야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마야의 연기를 문제 삼는 장면도 그 예시로 볼 수 있죠.

 

방파제를 올라가 홀로 바다를 직면하는 아사코

  아사코는 바쿠에게, 료헤이는 그런 아사코에게 무의식 중에 의존한 채로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있었기에 자신이 의존하고 있던 그 타자가 어떤 재난으로 돌변할 때 그 앞에 철저히 무력해져 버리고 맙니다. 극 중 도호쿠 대지진은 바로 그 점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소재가 됩니다. 대지진이 아니었다면 아사코와 료헤이는 재회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그들의 관계가 그렇게 파국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죠. 그러나 어떻게 보면 바로 그 대지진에 따른 재회가 있었기에, 아사코와 료헤이는 비로소 타자에 의존해 있는 자신에 대해 무지하던 상태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죠. 아사코는 그 파국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료헤이에 대한 마음을 분명히 알게 되며, 바쿠조차도 보지 못한 방파제 너머의 바다를 홀로 마주합니다.

 


 

" 민낯을 마주볼 수 있는 용기 "


  여기서 국가를 그 타자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개인들은 모두 스스로를 자신이 속한 국가와 연결 지어 '국민'으로 인식하죠. 이를 통해 국가의 정체성이 곧 개인의 정체성으로 연결됩니다. 도호쿠 대지진은 일본이란 한 국가의 민낯이 여실히 드러나게 된 계기가 되었고 이는 곧 일본 국민들 개개인의 정체성의 혼란으로 이어졌겠죠. 어쩌면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러한 개인-국가 간의 관계를 개인과 다른 개인 간의 관계로 치환하여 보여주기 위해 '로맨스'라는 껍질을 차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지진 앞에 국가라는 타자가 너무나도 낯선 얼굴을 드러내 보인 순간 일본 국민 개개인의 자아마저도 흔들리고 맙니다. 어쩌면 그들은 국가와 자신의 정체성이 연결되었기에 국가적 재난 앞에 자신들이 그토록 무력해져 버릴 수 있음을 처음으로 발견하게 되었겠죠.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인가? 황망함에 빠진 모두가 그에 대해 답하지 못합니다. <해피 아워>에서는 철저히 개인적 영역에 머물렀기에 카메라가 개인과 눈을 맞추는 순간 그 진심이 튀어 오를 수 있다는 어느 정도의 믿음이 있었다면, <아사코>에서는 아마도 그 타자의 범위를 국가로까지 넓혀가는 과정에서 그 진심의 순간에 대한 믿음이 현저히 낮아진 것이겠죠. 그렇기에 그토록 카메라와 인물들이 눈을 마주쳤음에도 진심이 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해피 아워>의 인물들과는 달리 <아사코>의 인물들은 그들 자신조차도 스스로에 대해 알지 못하므로 자신의 진심에 대해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흙으로 더럽혀진 강물을 보며 서로 엇갈리는 말을 하는 아사코와 료헤이

  타자에 대해 알 수 없고 나아가 그 타자에 의존해 있는 자아에 대해서도 알 수 없기에, 일본이란 국가 속 개인들은 지금 더러운 강물에 떠밀려 표류 중입니다. 하지만 하마구치 류스케는 아직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아사코는 더러운 강물이지만 아름답다고 말하고, 료헤이는 그저 더럽다며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봅니다. 카메라도 그들을 바라봅니다. 카메라는 그렇게 그들을 한참이나 마주 보다 지그시 눈을 감습니다.

 

한 줄 평가: 세상이 돌아가는 데 법칙이 있다. 하나는 부딪히며 멈추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상처를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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