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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ood Movies/드라마

<아이리시맨> _ 이 세상 마지막 갱스터

by 브리즈B 2020. 3. 19.

 

< 아이리시맨, 2019 >

 

감독: 마틴 스코세이지

출연: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조 페시

장르: 드라마 / 미국 / 범죄, 스릴러, 명작

 

2차 세계대전 참전군인인

프랭크 시런의 과거 회상으로부터 시작된다.

1950년대, 포장육 배달트럭 기사였던 

프랭크 시런(로버트 드 니로)은

물품 중 일부를 빼돌려서 지역의 갱들에게

팔다가 회사에 걸리게 된다.

 

IBT의 변호사인 빌 버팔리노(레이 로마노)는

프랭크가 자신이 판 갱들의 이름을 

끝내 불기를 거부하자, 사촌이며 갱 두목인

러셀 버팔리노(조 페시)에게 소개한다.

프랭크는 러셀의 의뢰를 받으며

살인을 포함한 그의 일을 하기 시작한다.

한편, 러셀은 프랭크를 국제노동조합 IBT의 위원장

지미 호파(알 파치노)에게 소개하는데..

 


 

" 아이리시맨 짚어보기 "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미국의 살아있는 거장답게 50년 동안 25편의 영화를 찍어오며 숱한 걸작들을 배출해 내었습니다. 최근 전작들이 스콜세지 감독의 전성기 때의 분위기나 임팩트를 보여주지 못했지만, 2019년에 20년 만의 갱스터 영화로 돌아오며 또 한 번의 정점을 찍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아이리시맨>은 20세기 미국 정치 이면에 존재했던 악명 높은 인물들과 연루된 한 남자(프랭크 시런)의 시선으로 장기 미제 사건 대명사 '지미 호파 실종 사건'을 그려낸 영화입니다. 지미 호파는 1950-60년대 미국 정계를 좌지우지했던 거대 노동조합의 우두머리로 1975년 실종됐지만, 아직까지 그 사건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지미 호파 실종 사건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장기 미제 사건 중 하나이지요. 영화는 여러 악명 높은 범죄조직 및 인사들과 연루돼 지미 호파 실종의 용의자로 지목되었던 프랭크 시런의 시선을 통해, 미국 근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지미 호파의 장대한 이야기를 드러냅니다.

 


__※ 주의 ※__

본 포스팅은 지극히 개인적인 리뷰이며 

단순히 제 의견이 틀리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것을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다소 부족하지만

다름을 근거로 한 냉정한 비판은 괜찮으며

본 리뷰에 앞서 영화 내용을 다룰 것이기 때문에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신 분들은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읽어주시기를 권장합니다.

 

" 당신은 프랭크를 찾아온 손님이다 "


<아이리시맨> 첫 장면 중, 요양원에 있는 프랭크

  <아이리시맨>의 첫 숏은 요양원 복도를 가로질러 프랭크에게 향하는 하나의 롱테이크로 구성돼 있습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프랭크에게 향하는 이의 정체가 철저하게 괄호 쳐져 있다는 점이죠. 그리고 그 신원불명의 누군가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결국 말하는 이의 프레임은 넘쳐나지만 듣는 이의 역 숏에 해당하는 프레임은 부재한 영화의 형식은 그 듣는 이의 자리에 관객을 배치하는 셈이 됩니다. 프랭크의 회고담에 근거한 플래시백으로 러닝타임 대부분을 할애하는 영화는 마치 한 편의 인터뷰 집을 연상시키는데, 공석인 인터뷰어의 자리에 오는 것은 결국 관객이며 인터뷰어가 된 관객은 개인의 재량 하에 인물의 유무죄를 심판하는 자리에 오르지요. 스콜세이지 감독은 평가를 유보한 뒤 판단을 관객의 몫으로 돌렸습니다. 프랭크라는 질문은 긴 영화 시간만큼이나 깊고 무겁습니다.

 


 

" 갱(Gang)이라는 이름으로 돌이킬 수 없는 "


  <아이리시맨>은 당연히 별다른 부가설명이 필요 없는 갱스터 영화이긴 하지만 동시에 두말할 것 없는 가족영화이기도 합니다. 전자의 영화로 갱스터 영화 측면에서 해석했을 시 영화의 좌우 축을 이루는 이들은 다름 아닌 지미 호파(알 파치노)와 러셀(조 페시) 일 것이고, 후자의 영화인 가족영화 측면에서 두 축을 담당하는 이들은 프랭크의 딸 페기(안나 파킨)와 지미 호파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양쪽 모두를 각각 떼어놓고 바라봐도 흥미롭지만 <아이리시맨>은 갱스터 영화와 가족영화 사이의 역학에 집중하여 바라볼 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슈퍼 종업원을 짓밟는 프랭크.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딸 페기

  영화는 변변찮은 인물의 상승가도를 다루는 전형적인 갱스터 영화처럼 전개되다가 후에 슈퍼에서 실랑이를 벌이다 돌아온 페기를 기점으로 가족영화와 갱스터 장르를 서서히 융합시킵니다. 가족을 위한다는 명목 하에 슈퍼 종업원을 실컷 두들겨 패는 프랭크의 모습을, 영화는 미화하지도 비판하지도 않은 채 관객에게 판단을 유보하며 이를 한 발짝 떨어진 롱숏의 촬영으로 관조하지요.(영화에서 프랭크가 자행하는 모든 살인은 이와 같은 롱숏의 냉정한 앵글에 담겨있다.)
  폭력이라는 악한 수단, 가족을 위한다는 좋은 구실, 그리고 이에 대해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는 듯 차가운 시선을 유지한 영화의 촬영은 분명 지극히 그릇됨 없이 정당하고 떳떳해 보입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이 사건을 부정적으로 해석한 이의 클로즈업이 인서트 됩니다. 아버지의 무차별적인 폭행을 겁에 질린 듯 바라보는 딸 페기의 클로즈업으로 말미암아 페기는 좋은 목적을 위한 아버지의 악한 수단을 그저 악한 수단으로 받아들입니다. 갱스터 세계에서의 성공을 보장했던 폭력의 결단이 가족 세계에서의 화목과는 양립하지 못할 것이란 암시로 보이는 해당 장면에서 출발하여 프랭크와 러셀에겐 적대감을 드러내던 페기가 지미와는 친밀한 유대감을 형성하게 되는 장면에까지 이르게 되면, 비로소 갱스터 영화와 가족영화가 대결할 영화적 기반이 완성됩니다.

 

페기는 정작 자신의 아버지 프랭크보다 지미 호파와 더 친하다

  그 후에도 영화는 이전과 비슷한 궤도를 밟아나가죠. 비록 영화가 경유하는 세계관은 혼돈 그 자체지만 프랭크는 특유의 거침없는 결단력과 판단력을 통해 어느덧 세계의 안정궤도에 돌입합니다. 하지만 그건 갱스터 세계에 국한된 이야기일 뿐이죠. 총기를 소지한 채 야밤에 일을 나간다고 말하는 프랭크를 의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페기의 표정, 그리고 러셀이 준 고가의 선물엔 프랭크가 명령조로 말하고 나서야 의례상 감사를 표하다 지미와 나눠먹는 아이스크림 한 컵에 진심 어린 미소를 짓는 그녀의 행동은 프랭크가 속한 안정궤도의 안정이 반쪽짜리에 불과함을 명시합니다. 그는 마피아 세계 속 임원의 역할에선 점차 상승하고, 가족의 세계 속 가장의 위치에서 점차 추락을 면치 못합니다.
  이를 은유하자면 그에게 물적 상승은 곧 영적 하강을 의미합니다. 흥미로운 건 이런 반비례의 법칙이 지미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인데, 프랭크의 경우와는 반대로 지미는 출소 후에 사회적 지위가 하강하고 반대로 페기와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져 어느 덧 사실 상 그녀의 양아버지 위치에 오르죠. 시간이 지나 지미와 페기의 유대감이 두터워져 어느 덧 서로가 양부 양자의 관계에 이르렀을 때 프랭크는 선택의 기로에 당돌합니다.

 

프랭크는 지미를 살해해야하는 임무를 지닌 채 지미와 만나 차 안에 태우고 그의 집으로 향한다

  지미를 살해해야 하는 하는 프랭크의 임무는 달리 말하면 실리를 우선시해야 하는 임원으로서 자신을 믿어준 동료를 살해해야하는 갱스터의 임무이며 동시에 딸아이의 양부에게 일종의 콤플렉스를 느끼는 친부로서 양부를 살해해야하는 아비의 임무인 것입니다. 갱스터 영화와 가족영화가 마침내 포개어진 대단히 막중한 순간이 도래했을 때 영화는 다시금 냉랭한 태도로 일관합니다. 현재, 과거, 대과거의 시제 중 과거에 해당하는 프랭크의 지미 호파 암살 에피소드엔 특정한 감정을 호소하는 일말의 ost도 깔려있지 않으며 오로지 조직원으로서, 그리고 아비로서 프랭크가 느끼는 딜레마만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영화의 편집은 인물의 고뇌를 보다 더 격화시킵니다. 프랭크가 지미를 살해하고 돌아올 때, 영화는 그 경로를 경비행기가 항공로를 통과하는 하나의 숏으로 요약하죠. 이와 대조적으로 프랭크가 지미를 살해하러 갈 때의 극 중 경로는 불필요하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구체적입니다. 경비행기의 이동경로를 보여주는 것은 물론이고 프랭크가 중간지점에 들려 다른 이의 차로 갈아타는 과정, 차를 갈아탄 뒤 이전에 본인의 차로 지나쳤던 거리를 다시금 반복해서 지나가는 과정을 반복 배치함으로써 상황의 유예를 통해 영화는 지미를 살해해야 하는 임무가 프랭크에게 얼마나 물리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고된 여정임을 보여줍니다.

 

위의 인물의 사망 사유는 간단한 자막 정보로 처리된다

  마침내 프랭크가 지미를 살해하는 대목은 이질적이지 않게 연출되었다는 점에서 되려 더 이질적이게 느껴질 정도로 이전의 숱한 살인 장면과 별 다를 것 없이 평범하게 연출되었습니다. 이는 곧 죽음을 바라보는 영화의 태도이며 동시에 인물을 대하는 영화의 태도로 읽힙니다.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할 때마다 영화는 자막을 통해 인물들의 최후를 타이핑하죠. 예컨대 xxx:1980년에 총격으로 사망. 이런 식으로 말이죠. 이러한 순간의 장난에 가깝게 보이는 재치 있는 타이핑들이 모이고 모이면 결국에 영화 속 죽음은 만연한 사건이 되죠.
  결국, 모두가 필멸의 존재인 셈입니다. 말단 직원의 총격 사망이든, 시대를 호령했던 지미 호파의 죽음이든, 후자의 인물이 더 극적인 삶을 살았다고 해서 그의 죽음까지 더 드라마틱한 것은 아닙니다. 지미를 향한 프랭크의 총격엔 그 직전 관객들이 기대할 법한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니로의 극적인 명연과 스콜세지 감독의 이색적인 연출이 더해지지 않습니다. 그저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프랭크의 비열한 총격과 지미의 허무한 죽음이 툭 내던져질 뿐이죠. 그리고 영화는 갱스터 영화의 측면에서든, 가족영화의 측면에서든 여러모로 가장 중요한 인물의 죽음을 여타 인물들의 죽음과 동등한 층위에 올려놓은 뒤 이전과 같은 담담한 카메라 앵글을 통해 다시금 심판의 위치에 있는 관객에게 프랭크의 행위를 심판하게 합니다.

 

프랭크가 직접 고른 초록색 관

  양부를 살해함으로써 친딸(페기)의 신뢰를 잃은 친부(프랭크)는 가족영화에서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그의 마지막 동아줄인 갱스터 영화마저 막바지에 접어듭니다. 지미를 살해하고 프랭크가 얻은 이득은 최소한으로, 반면에 그 후의 난처한 과정들을 최대한으로 연장시키는 영화의 편집은 프랭크의 완패를 선언하죠. 살아남는 것이 갱스터 영화의 승리 요건이고 잘 사는 것이 가족영화의 승리 요건이라 하였을 시, 그는 잘 살진 못했어도 어쨌든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영화의 종반부는 추한 과정과 영적 타락을 통해 부지한 육체의 생존이 늙음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되묻습니다. 도로 전체의 소유주에서 교도소 한 구석에 앉아 벌벌 떨리는 손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씹지도 못하는 빵 조각을 잇몸으로 짓누르는 신세가 된 러셀, 돌봐줄 이 하나 없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힘겹게 한 발 한 발을 내딛으며 걷는 프랭크. 수십 번의 살인교사와 살인, 그리고 협박과 같은 불법을 통해 그들이 건져 올린 유일한 결과물은 고깃덩어리라 해도 좋을 미련한 육신이 전부입니다. 이 둘과 달리 이미 목숨을 잃은 지미는 화장을 당하고 후대 인물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지며 육체와 정신 양쪽 모두에서 소멸당하죠. 그래서일까요? 프랭크는 자신 곁에 아무도 남지 않은 사실상의 정신적 소멸 상태에서 굳이 화장을 꺼려하며 관에 묻힐 것을 고집합니다. 앞서 프랭크는 지미의 화장 과정을 목격한 바가 있기에 육체적 소멸만은 모면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런 프랭크의 고집은 육체성의 중요함을 믿는 자의 신념이 아니라 죽은 몸뚱이라도 한 번 남겨보려 발버둥 치는 자의 알량한 자존심으로 보이기에 유독 쓸쓸하게 보입니다.

 


 

" 방문을 열어놓을 것인가, 닫을 것인가 "


  그렇다면 이 영화의 제목이 왜 ‘아이리시맨’(아일랜드 사람)인가. 프랭크가 아일랜드 출신 이민자인 건 이미 영화가 초반부터 밝힌 바가 있지만 그게 영화 전반을 좌우하는 핵심 설정도 아니지 않습니다. ‘아이리시맨’이라는 공동체의 느낌이 다분한 제목을 영화가 내세웠다는 점, 그리고 그 제목이 지칭하는 이가 명백히 프랭크라는 점을 감안했을 시 우리는 프랭크가 어떠한 공동의 가치를 대표하는 인물임을 예감합니다. 그렇다면, 프랭크는 어떤 인물상을 대표하는가. 제목에 떡하니 박힌 아일랜드인 이라는 말, 그리고 아일랜드에서 건너와 미국에서 마피아와 동업하며 사는 프랭크의 상태를 통해 추측해보는 게 아무래도 좋겠죠.
  19세기 초에 미국으로 건너온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사실상 현재 미국 마피아들의 모태 격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애초부터 이들이 마피아 집단을 결성하기 위해 작정하고 미국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9세기 초 사회적 멸시의 대상이었던 당대의 그들은 서로의 권익을 위해 유사가족의 무리를 조직하고 부당한 공권력에 맞서 싸웠습니다. 하지만 이랬던 그들의 정의로운 행보는 결국에 변질되어 지금의 범죄 집단에 이르렀죠. 결국 영화 내내 가족의 안위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온갖 범법행위를 일삼았던 프랭크의 일대기는 큰 틀에서 19세기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행동과 완전히 겹쳐집니다. 그렇다면 <아이리시맨>의 프랭크는 가족을 지키자는 본래의 좋은 목적을 범법이란 변질된 방식으로 지켜온 어느 인물상에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초반부에 페기를 데리고 종업원을 폭행하는 프랭크의 에피소드는 캐릭터에 대한 완벽한 요약이죠. 이제, 그런 인물상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아이리시맨> 엔딩 장면

  프랭크는 자신의 딸 페기에게 철저히 외면당합니다. 그리고 그 역시 페기가 자신에게 마음을 열지 않은 것처럼 진실을 요구하는 이들을 철저히 외면한 채 돌아섭니다. 이어서 뜬금없이 방문을 조금 열어둘 것을 누군가에게 부탁한 채 사라지는 프랭크의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런 엔딩은 스쳐 지나가는 듯 보였던 영화의 중반부에 등장하는 하나의 숏과 정확히 나란한 위치에 있습니다.
  지미와 프랭크가 같은 객실에 투숙하는 한 장면에서, 지미는 방문을 살짝 열어둔 채 잠에 듭니다. 그리고 이어서 방문 밖에서 열린 방문을 바라보는 프랭크의 시점이 우리에게 제시되죠. 그 당시의 지미가 프랭크가 있음에도 방문을 열어두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방문을 닫을 필요가 없었다는 것, 즉 프랭크를 신뢰하였다는 것.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지미는 프랭크를 신뢰하였기에 그의 손에 죽게 됩니다. 엔딩에 이르게 되면, 프랭크는 그 신뢰의 방에 직접 들어갑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방문 밖에서 열린 방문을 바라보는 시점이 제시되죠. 앞선 중반부의 장면에서 방문을 바라보는 시점의 주인이 프랭크였다면 그 순간 그 방문을 보고 있는 자는 바로 관객입니다. 가족의 신뢰를 저버리고, 다른 이에게 신뢰를 표하지 않는 노년의 프랭크는, 그 신뢰가 자신의 죽음을 초래할지도 모름을 알면서도 관객에게 벌어진 문틈만큼의 신뢰를 구걸합니다. 지금 내 곁엔 아무도 없지만 이 긴 이야기를 들은 당신들만큼은 나를 믿어줄 수 없느냐고 말하는 이 노인에게 그 방문을 열고 들어가 어찌 됐든 감사했다 말할 것인지, 아니면 방문을 닫고 매정하게 돌아설 페기가 될 것인지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철저히 개인의 몫일 터입니다.

 

한 줄 평가: 주름진 시간의 표면에서 드러난 황금기의 생애 그리고 쓸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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