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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ood Movies/드라마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_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을 향한 경애

by 브리즈B 2020. 3. 21.

<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2019 >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

출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브래드 피트, 마고 로비

개요: 드라마 / 미국 / 우정, 코미디, 폭력적인

 

1969년 할리우드,

잊혀 가는 액션스타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그의 스턴트 배우 겸 매니저인
‘클리프 부스’(브래드 피트)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새로운 스타들에 밀려 큰 성과를 거두진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릭’의 옆집에

할리우드에서 가장 핫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과

배우 ‘샤론 테이트’(마고 로비) 부부가 이사 오자

‘릭’은 새로운 기회가 생길 수도 있다고 기뻐하지만
인사조차 나누지 못한다. 

형편상 더 이상 함께 일할 수 없게 된 ‘릭’과 ‘클리프’는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하고

‘릭’의 집에서 술을 거나하게 마시던 중

뜻하지 않은 낯선 방문객을 맞이하게 되는데…

 


 

"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짚어보기 "


  장편영화를 고작 8편밖에 찍지 않은 타란틴노 감독은 현대의 즐비한 창작자들과 영화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뒤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10이라는 숫자가 완성되면 두말 않고 영화계를 떠나겠다고 선언했던 적이 있죠. 자신의 퇴장이 눈에 선해서였을까요? 그는 자신의 아홉 번째 영화인 본 영화의 배경을 할리우드로 설정하고, 극 중 인물들의 직업을 영화업계 종사자들로 설정하여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영화에 대한 영화로 볼 수밖에 없게끔 영화를 구성했습니다. <킬빌>의 트릴로지를 완성시킬지, 아니면 스타트렉의 시퀄을 감독할지, 자신의 마지막 행보는 자신도 알 도리가 없다고 말했죠. 타란티노 감독에게 주어진 필수과제는 아마 그토록 자신이 사랑해온 이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자신만의 헌사가 가득한 코멘트를 남기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 주의 ※

본 포스팅은 지극히 개인적인 리뷰이며 

단순히 제 의견이 틀리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것을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다소 부족하지만

다름을 근거로 한 냉정한 비판은 괜찮으며

본 리뷰에 앞서 영화 내용을 다룰 것이기 때문에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신 분들은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읽어주시기를 권장합니다.

 


 

" 영화인들을 대하는 타란티노의 마음 "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샤론 테이트

  타란티노는 시대의 흐름을 견디지 못한 당시의 영화인들을 불러냅니다. 한물간 50년대의 스타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그의 스턴트 클리프 부스(브래드 피트), 그리고 영화인의 이미지보다는 유명 감독의 살해당한 와이프로서의 이미지가 더 선명한 샤론 테이트(마고 로비)까지. 공항에서 기자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하며 집으로 귀가하는 샤론의 모습과. 단 둘이 쓸쓸히 집으로 돌아오는 릭과 클리프의 모습을 극명히 대비시키며 시작하는 영화는 릭과 클리프의 수난사로부터 시작하죠. 샤론이 극장에서 두 발을 뻗은 채 편히 영화를 감상하는 대목에서, 영화는 곧장 촬영 현장 속 릭의 모습으로 점프합니다. 자신의 연기를 회상하며 흐뭇한 마음으로 영화를 보고 있는 샤론의 모습과는 달리 현장 속의 릭은 자기혐오에 갇혀 제 기능을 발휘 못한 채 심히 고통에 겨워하고 있죠.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못 미더운 연기 덕에 분에 겨웠던 나머지 본인의 트레일러에서 난동에 가까운 광기를 분출합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엿보이는 건 분명 인물에 대한 영화의 '희화화'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끝에서 발견되는 건 묘하게도 인물에 대한 경애의 마음입니다.

 

  최대한 편한 자세로 영화를 감상하는 이와 최대한의 고통을 느끼며 영화를 촬영하는 이의 연결, 혹은 안락한 객석에서 고된 현장으로의 연결은 그 자체로 지난한 과정을 이겨내고 우리에게 영화라는 값진 결과물을 선사했던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로 귀결됩니다. 그런 한바탕의 소동이 지나간 후에 릭은 그날의 최고 테이크를 연기하죠. 그리고 타란티노 감독은 69년 당시 자신의 나이 또래였을 한 아이의 입을 빌려 릭에게 극찬의 대사를 날리며 당대의 이들에게 경애의 마음을 전합니다. (해당 장면에서의 어린 소녀가 감독의 분신이라는 고리타분한 말은 아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있고 그 누구보다 일에 진지하게 임하는 그 소녀는 영화에 대한 감독 스스로의 순정이나 초심의 마음이 투영된 인물이라는 게 분명히 보인다.)

 


 

" 샤론 테이트 "


히피들 사이에 끼어 있는 클리프

  릭이 고된 하루를 보냈듯이 클리프에게도 그날의 하루는 참으로 달갑지 못했는데요. 클리프에게 진정 필요한 건 현장의 활기일 테지만 정작 그에게 주어진 업무는 릭의 안테나 수리입니다. 그리고 그는 주어진 지루한 잡무를 수행하던 와중에 건너편에 있는 폴란스키 감독의 저택을 바라보며 현장에서 쫓겨났던 불명예의 과거를 재차 회상합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죠. 이어지는 장면들은 클리프에게 수치와 모욕의 감정들을 전달합니다. 히피들의 거주지에 도착한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들의 불청객으로 낙인찍힙니다. 클리프도 그들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죠. 클리프에게 히피들은 릭과 같은 50년대의 스타들을 퇴물의 자리로 밀어내고 주류를 차지한 하나의 문화흐름이며 작중 상황에선 자신의 전성기 시절의 공간을 탈취해 자신들의 거주지로 삼고 있는 그다지 미덥지 못한 존재들입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차에 모인 릭 & 클리프

  클리프는 쏟아지는 경멸의 시선을 뚫고 기어코 옛 친구인 은퇴한 영화 제작자 조지(브루스 던)를 만나러 갑니다. 그러나 경멸의 시선을 통과하고 만난 옛 친구의 기억 속에 '조지'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죠. 조지는 클리프를 잊었다 말하나 클리프는 여전히 그를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말할 수 있죠. 그리고 히피 무리 중 하나는 클리프를 향해 진짜 장님은 조지가 아닌 당신이라 소리칩니다. 영화 전체를 영화에 대한 영화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이러한 상호 간의 대사는 다음과 같이 번역됩니다. “관객은 이미 당신을 잊었다. 시대를 착오하고 있는 자는 관객이 아니라 당신이다.” 해당 장면의 작중 공간이 영화와 관련된 공간이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런 각자의 일과를 보내고 온 릭과 클리프는 차를 타고 돌아가며 서로의 하루를 묻는 관습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얼마나 수고스러웠을지를 누구보다 잘 알 테니까요.

 

샤론 테이트

  이처럼 영화는 릭과 클리프의 수난에 가까운 하루를 통해 잊힌 영화인들의 고투를 조명합니다. 여기서 다소 이상하게 다가오는 건 샤론 테이트가 포함된 플롯입니다. 영화의 플롯은 릭의 이야기, 클리프의 이야기, 그리고 샤론의 이야기라는 이 3가지 플롯이 서로 얽히고설키는 방식으로 짜여 있지만 거의 하는 일 없이 놀고먹는 삶이라 봐도 좋을 그녀의 이야기는 얼핏 보기에 잉여에 가깝습니다. 영화의 후반부 무렵에, 객석에 긴장감이 감돌죠. 왜냐하면 미국 할리우드 근대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다들 샤론 테이트가 맨슨 패밀리라는 희대의 살인마 집단에 의해 무참히 살해될 것임을 알고 극장에 왔기 때문이죠. 하지만 대략 30분 남짓의 폭주의 클라이맥스가 지나고 나면 좌중은 의문에 빠집니다. 인지 부조화라 봐야 좋을까요? 분명 관객의 상식 속에서 살해되어야 하는 샤론 테이트는 피 한 방울조차 흘리지 않습니다. 영화의 막이 오르면 관객들은 그제야 샤론 테이트는 하나의 맥거핀(작품 줄거리에 영향을 주지 않지만, 관객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묶어 둠으로써 공포감이나 의문을 자아내게 만드는 영화 구성상의 속임수)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죠

 

칸 영화제 기자회견장

  샤론 테이트가 살해되었다는 역사적 전례는 본 영화가 다루는 서스펜스에 해당하는 맥거핀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샤론 테이트의 존재 자체가 그저 맥거핀에 불과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번외로 올해 칸 영화제에서 샤론 테이트의 존재를 후자로 해석한 한 명의 기자가 쿠엔틴 타란티노에게 배우 마고로비를 왜 이렇게 밖에 활용하지 못했냐며 따져 든 바가 있죠. 이러한 질문에 타란티노는 분을 삭이며 “나는 당신의 생각을 부정합니다.”라고 간단히 응수했습니다. 이에 대해 사견을 덧붙이자면, 해당 질문을 한 기자는 필히 영화를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가 가장 뭉클하게 다가올 때는 타란티노가 샤론 테이트를 다룬 방식을 곱씹을 때니까요.

 

로만 폴란스키 & 샤론 테이트 부부

  극 중 샤론 테이트는 시종 영화계의 가십에 둘러 싸여 있는 인물로 비치죠. (클리프 또한 마찬가지의 상황에 처해있다.) 믿거나 말거나 그녀는 막장 스캔들의 주연이며 배우 샤론 테이트가 아닌 잘 나가는 감독의 아내라는 이미지에 갇혀 있습니다. 현실의 샤론 테이트는 이에 비교조차 안 될 만큼 끔찍하죠. 우리 대부분은 그녀를 샤론 테이트 사건의 피해자로 기억합니다. 영화에서든 현실에서든, 우리 중 그 누구도 그녀를 배우, 혹은 예술가로 바라봐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타란티노 감독만큼은 다르게 봅니다. 그는 그녀를 예술가로 해석합니다. 음악을 끼고 살며 늘 흥에 젖어 있는 샤론 테이트, 극장에서 자신의 영화를 감상하고 촬영장에서의 일화를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순수한 배우 샤론 테이트, 그다지 유명하지 못한 릭 달튼을 여태껏 기억하며 기꺼이 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 '영화인' 샤론 테이트. 타란티노는 최소한 자신의 영화에서만큼은 샤론 테이트가 영화인으로 기억되길 바라며 몸소 그녀를 지켜주려 합니다. 그리고 '영화인'이라는 그녀의 타이틀을 뺐어간 현실 속 이들을 영화라는 이름을 빌려 가차 없이 응징하려 합니다. 그동안 자신이 자주 애용해온 방식으로.

 


 

" 옛날 옛적을 추억하며 "


  전작인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2009>에서, 타란티노는 관객의 입장에서 작중 시점이 명백히 추측이 가능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영화의 초장에 옛날 옛적~이라는 명칭을 이용하여 시점을 흩트리며 이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지만 어디까지나 철저히 나의 이야기임을 전언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 그는 의도적으로 대척점에 있는 형식을 채택했습니다. 영화가 시작하면 우리는 1969년 2월 8일이라는 이보다 더 구체적일 수 없는 자막을 마주하죠. 오프닝의 시점으로부터 6개월 후에 해당하는 영화의 후반부는 구체적의 극을 달립니다. 마치 한 편의 종합적인 기사를 연상시키는 영화의 후반부는 구체적인 년도와 날짜가 제시되는 것뿐만 아니라 정체불명의 내레이터까지 개입하여 우리에게 사건의 사실성을 극대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성은 자연스레 우리에게 샤론 테이트 사건의 결말을 상기시켜 관객을 긴장에 빠트리죠. 그런데, 그러한 사실성은 어떤 이의 대사를 기점으로 우리를 철저하게 배반합니다.
  “저 사람 릭 달튼 아니야?” “영화는 우리에게 살인을 가르치잖아.” 단언컨대 영화의 후반부를 지배하는 두 대사죠. 맞아 죽어도 싼 나쁜 놈을 설정한 뒤 말 그대로 맞아 죽을 만큼 그들을 패버리는 단순 무식의 카타르시스를 추구해온 타란티노는 이번 역시 동일한 노선을 걷습니다. 사실 맨슨 패밀리는 텍스트 바깥에서의 사건 덕에 이미 죽여도 싼 놈의 위치에 올라있죠. 하지만 타란티노는 여기다 한 가지 흥미로운 설정을 가미합니다. 만약 이들이 영화를 책임전가의 대상물로 전락시킨다면? 할리우드 내에서 그 누구보다 영화를 사랑해왔음을 주장해온 그에게 있어 영화를 핑계 대며 살인을 저지르는 누군가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죽어도 싼 놈으로 자리 잡힙니다. 이는 그동안 자신의 영화 속 폭력에 대해 모방 위험성이란 잣대로 비판해온 이들에게 보내는 하나의 메시지로 볼 수 있습니다. 영화감독은 도덕 선생님이 아닙니다. 영화를 통한 모방범죄의 죗값은 영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방범에 있는 것이죠.

 

릭 달튼의 집에서 악행을 저지르기 전, 핑계를 대며 달아나는 여성. 그녀는 릭 달튼을 기억한다

  맨슨 패밀리 인원 중 릭 달튼을 왕년의 스타로 기억하는 한 여성은 일을 거행하기 이전에 차를 타고 달아납니다. 말하자면 나쁜 놈들 중 영화인을 잊지 않은 한 명의 인물에게 건네는 타란티노의 선물이죠. 오로지 그녀만이 이 끔찍한 징벌을 피할 수 있습니다. 영화를 빌미 삼아 끔찍한 일을 도모했던 이들에게 남은 결말은 현장의 활력에 굶주렸던 스턴트맨의 밥이 되는 것뿐이죠. 언제나 그의 영화엔 다음과 같은 항의의 글이 치밉니다. 타란티노의 영화는 관객의 내면에 잠재된 폭력성을 일깨우는 나쁜 영화라고. 개인적으로는 죽어 마땅한 이를 죽이는 데 활용될 폭력성을 일깨우는 것이 어째서 나쁜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있습니다. '폭력성을 일깨우는 것은 나쁘다'라는 문장은 너무 비약적으로 다가옵니다. 이건 세상에 죽어 마땅한 사람이 있는가에 대한 찬반 토론의 문제로 볼 수 있죠. 우선 다른 요소들을 다 제쳐놓고 이 영화 안팎을 통틀어 가장 나쁜 인물 하나를 꼽자면 서스펜스를 빌미로 샤론 테이트의 죽음을 바란 익명의 관객일 수도 있죠.

 

  유혈이 낭자한 한바탕의 대참사가 끝난 뒤 릭은 샤론의 집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조금 음산한 분위기의 OST는 우리에게 어쩌면 아직 끝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자아냅니다. 여전히 샤론은 살아있으니까요. 그러나 일부 관객들의 기대를 저버리며 영화는 그대로 종료됩니다. 그리고 영화의 타이틀인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즉 우리말로 옛날 옛적 할리우드에서 라는 자막이 떠오르며 다시 한번 영화의 텍스트는 사실 그대로의 이야기가 아니라 타란티노 특유의 옛날 옛적에~식의 만담으로 귀결됩니다. 그 이야기 속엔 잊히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릭과 클리프의 애환이 있으며 예술가로서의 샤론 테이트의 생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전하는 타란티노의 경애가 깃들어 있죠.

 

한 줄 평가: 회복 불가능한 노스탤지어를 영화라는 방식으로 복원시킨 타란티노의 러브레터(Dear. Hollyw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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