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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ood Movies/드라마

<기생충> _ '상'과 '하'의 경계보다 무력하게 만드는 '하'와 '최하'의 경계

by 브리즈B 2020. 4. 5.

< 기생충, 2019 >

 

감독: 봉준호

출연: 송강호, 최우식, 박소담, 장혜진, 조여정, 이선균, 이정은, 박명훈, 정지소, 정현준

개요: 드라마 / 한국 / 철학적인, 명작

 

전원백수로 살 길 막막하지만

사이는 좋은 기택(송강호) 가족.

장남 기우(최우식)에게 명문대생 친구가 

연결시켜 준 고액 과외 자리는

모처럼 싹튼 고정수입의 희망이다.

온 가족의 도움과 기대 속에

박사장(이선균) 집으로 향하는 기우.

글로벌 IT기업 CEO인 박사장의 저택에 도착하자

젊고 아름다운 사모님 

연교(조여정)가 기우를 맞이한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두 가족의 만남 뒤로,

걷잡을 수 없는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기생충> 1차 예고편

 


 

" 기생충 짚어보기 "


  기우처럼 대학 진학에 실패한 것도 아니고, 유복함과는 거리가 멀더라도 반지하에 살만큼 형편이 궁핍하지는 않음에도, 저에게 영화 <기생충>은 그 어떤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보다도 강한 무기력함과 심란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단지 현시대의 계급과 자본의 메커니즘을 다루었기에 느껴지는 당연한 불편함이라 치부하기엔 그 불편함의 수치가 말 그대로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높다고 느껴졌기에, 영화의 힘을 다소 과소평가하는 저의 시각에선 개인적으로 조금 놀라운 부분까지 있었습니다. 봉준호 감독 특유의 웃음 뒤에 숨겨져 있는 비수와도 같은 씁쓸함이 이번엔 유독 더 쓰라렸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 주의 ※

본 포스팅은 지극히 개인적인 리뷰이며 

단순히 제 의견이 틀리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것을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다소 부족하지만

다름을 근거로 한 냉정한 비판은 괜찮으며

본 리뷰에 앞서 영화 내용을 다룰 것이기 때문에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신 분들은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읽어주시기를 권장합니다.

 



 

" 제로섬 게임 "


영화의 첫 숏. #반지하.

  전원백수 가족의 장남인 기우(최우식)가 상류층 저택에 고액 과외 면접을 보러 간다는 영화의 기본 시놉시스는 우리로 하여금 본 영화는 (자본의 원리가 규정한) ‘상’과 ‘하’의 계급적 충돌, 내지는 (제목으로 좀 더 유추해 보면) ‘하’가 ‘상’을 갉아먹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추측케 합니다. 그러나 영화의 오프닝은 우리가 예상하고 기대한 그런 내용이 어쩌면 아닐지도 모름을 슬며시 알려주죠. 영화의 첫 숏에서, 기우네 가족의 거처가 반지하라는 것을 구태여 확인시켜주는 것 같이 지상에 머무르던 카메라가 수직으로 하강하고 나면 우리는 와이파이 접속에 실패하는 기우의 모습을 확인하죠. 곧바로 이어지는 기택(송강호)이 바퀴벌레를 쫓아내는 장면과 기정(박소담)과 기우가 피자집 알바를 험담하며 은근슬쩍 구직을 도모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와이파이와 관련된 오프닝 에피소드의 연장선상입니다. 지상에 거주하는 가족들은 그 밑의 반지하의 가족들에게 도움을 차단하고, 반지하의 가족들은 애꿎은 지상의 아르바이트생을 내쫓으며 본인들이 그 자리를 대체하려 하는 이러한 영화의 오프닝은 사실 본 영화의 내용이 ‘상’과 ‘하’의 계급적 혈투가 아닌 그 아래 계급들 간의 치열한 암투에 더 가까움을 은연 중에 쓱 내보입니다.
  (오프닝에서 이미 드러난 것처럼) 영화 전체를 작동시키는 원리는 양자의 이득과 손해의 합이 0을 이룬다는 '제로섬 게임'입니다. 본 영화에서, 누군가의 이득은 필히 또 다른 누군가의 손해를 전제로 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누군가의 이득만큼. 기택의 가족이 박사장의 저택으로 하나 둘 침투하는 과정을 뒤집어 생각하면 이미 저택 내에 자리 잡은 인물들을 하나 둘 쫓아내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기택의 4인 식구 중에서 기정만 누군가를 대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3명의 가족이 스스로 이득과 손실을 파생시키며 저택에 침투한 것과 다르게 기정은 스스로 이득만 본 셈이니 어쩌면 결말부에 기정이 죽게 되는 건 제로섬 게임의 원칙에 따른 필연적 결과가 아니었을까.)

 

연교에게 해고 당한 후, 길거리에 내던져진 문광

  따라서 우리는 문광(이정은)이 저택에서 쫓겨나게 되는 영화의 시퀀스를 그 경쾌한 리듬에도 불구하고 그저 웃으며 바라볼 수는 없죠. 후에 문광이 길거리에서 쫓겨나는 장면이 덧붙여지면 우리의 씁쓸함은 늘어남과 동시에 기택의 가족에 대한 우리의 몰입이 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의문까지 합니다. (당연히 우리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기택네에게 몰입하게 되고 그들의 편에 서게 되나, 엄밀히 영화 속 인물들의 잘잘못을 전부 따져봤을 시, 그건 윤리적으로 꽤나 위험하다고 봐도 무방할 만큼의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러나 기택의 가족은 본인들의 이득으로 파생된 다른 이들의 손해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저 기정이 쫓아낸 기사는 지금 쯤 뭐 하고 있을지를 가볍게 농담처럼 내뱉을 뿐이죠. 그러던 찰나에 이들에게 본인들이 낳은 누군가의 비극을 상기시켜줄 문광이 갑작스럽게 등장합니다. 번쩍하는 번개에 이어 영화의 전개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치닫고 지상과 반지하의 대결로 시작한 영화는 반지하와 지하의 암투극으로 변합니다.

 


 

" 흐르는 물은 영원히 하강한다 "


기택, 기정, 기우는 박사장네 집에서 도망쳐 나와 계단을 내려간다. 기우는 계단을 내려가던 중, 잠시 멈칫하고 발밑을 내려다본다.

  미처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공간과 인물의 등장에 대해 영화는 끝없는 추락과 하강의 프레임으로 일관하죠. 이미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감독의 전작인 <설국열차>가 수평의 계급적 투쟁기였다면 <기생충>은 유사한 이야기를 수직으로 구현됩니다. 그리고 계급을 다룬 수많은 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기생충> 역시 계급에 관한 이 수직의 구도를 상승과 하강, 더 구체적으로는 계단으로 형상화합니다. 예컨대 박사장(이선균)의 집으로 가는 동안, 기우는 끊임없이 어딘가를 올라가야하고, 반대로 근세의 거주지인 지하로 가기 위해선 계단을 통해 끝없이 밑으로 내려가야만 하죠. 그러나 계단은 이들의 계급적 높낮이를 상기 시키기도 하지만 상승에 대한 기택네의 욕망이 내포되어 있기도 하며 또 자의에 따라 오르고 내릴 수 있기에, 계급의 측면에서 나름 고무적으로 보일 여지 또한 존재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에 물의 속성을 대입해 이들의 희망이나 의지를 무력화시킵니다. 물의 속성을 하나로 단정 짓기는 힘들겠지만 물은 기본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흐르며 역류가 불가능하죠. 이러한 물의 비가역적인 성질은 극 중 기택네의 계급적 상황을 묘하게 암시하는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류하는 오물을 변기 위에 올라앉아 막는 기정

  예를 들어 영화는 기택네의 가족이 계급적으로 가장 상승했을 때의 모습을 기정이 고급의 물을 마시며 목욕을 하는 장면으로 대체하고, 반대로 가장 계급적으로 하강했을 때의 모습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폭우에 쩔쩔매는 이들의 힘겨움으로 대체합니다. 물론 이때는 계단 역시 상승의 욕구 대신 하강의 강요로서 기능합니다.(영화는 끝없이 계단을 내려가는 기택과 기정, 그리고 기우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오랫동안 전시한다.) 구직에 실패했을 때엔 술에 취한 행인에게 꼼짝도 못 했던 것과는 다르게 본인들의 계급적 상승을 처음 자축할 때가 돼서야 마침내 노상 방뇨하는 행인을 물로 쫓아내는 것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과한 해석일지도 모르겠지만 소변 또한 체내에 존재하는 수분의 일환으로 바라본다면 그들에게 물을 뿜어대는 만취한 행인의 행동 역시 반지하에 대한 지상인의 공격, 즉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된 모티브 중 하나인 아래 계급들 간의 실랑이로 읽어볼 법 한 여지가 있다.) 극 중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물이라곤 변기에서 역류하는 오물뿐이죠. 기택의 가족은 계급적 상승을 위해 열심히 계단을 오르내리며 분투해보지만 영화는 되려 이들을 오물로 치환해버리며 이들을 처연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기생충>은 계단의 희망을 물의 속성으로 잠재워 버립니다.

 

학교 체육관에 피신한 후, 기택은 최고의 계획이 무계획이라 말한다.

  영화는 폭우로 인해 체육관으로 피신한 기택의 가족의 처량함을 계속 이어나갑니다. 그날 저녁 기택은 아들 기우에게 최고의 계획은 무계획이란 괴상한 논리를 설파하죠. 그러나 그 괴이한 논리를 그저 괴상하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미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손으로 본인의 눈을 가리며 정말 아무것도 보지 않겠다. 라는 기택의 행동엔 오로지 무기력한 의지만 가득합니다. (기택이 처음 손으로 눈을 가리는 순간은 박사장 네 탁자 밑에 숨어 박사장 부부가 내는 민망한 소리와 본인에 대한 모독을 마지못해 들어야 하는 순간이다. 기택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고난이 찾아올 때마다 아무것도 보지 않으리란 의지를 표하며 본인의 무기력함을 스스로 반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말 뜬금없게도 그러한 기택의 무력감은 분노로 전환되며 결국엔 우발적 살인의 계기가 됩니다.

 


 

" 기택은 왜 박사장을 죽였을까 "


카메라 포커스가 기택(송강호)에게 향한다. 마치 처량하게 바라보는 듯이.

  여기서 영화가 초반부터 쌓아온 기택의 모멘트를 재구성 해보자면, 개인적으로 사건의 발단은 텍스트 바깥에 존재하는 인물의 뜬금없는 대사로 비롯된 것 같습니다. 영화의 초반부에, 기택의 가족이 부업으로 삼는 일에 문제가 생기자 사장은 넷 중에 하나는 불량인 것이라 비아냥거리며 이들을 면박하죠. 분명 대사는 누군가를 특정적으로 지목하진 않지만 이때 카메라의 포커스는 기택에게로 향하며 그의 자격지심을 자극합니다.

 

기택: "그래도 아내 분을 사랑하시죠?"

  기택이 박사장의 차를 운행하는 후의 장면에서, 그는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박사장의 사생활에 대해 논하다 조금 선을 넘게 되고 박사장에게 다시 앞을 보고 운전하라는 면박을 받게 됩니다. 기택의 자존심이 긁히는 순간이며 동시에 영화가 기택의 모멘트를 사소한 방식으로 추가하는 두 번째 순간이죠. 위에서 언급한 대목들이 사소한 순간들이었다면, 기택이 캠핑을 간 박사장의 집에 몰래 침입한 이후에 쌓이는 모멘트들은 대단히 막중합니다. (사실 그 이전에 문광을 쫓아내는 시퀀스의 말미에서 연교(조여정)가 악수를 위해 내민 기택의 손을 꺼림칙하게 쳐다보는 순간을 결정적 모멘트의 첫 순간이라 봐도 무방하다.) 먼저, 여기서도 시작은 사소합니다. 캠핑을 간 박사장의 빈집에서 술을 마시며 기택은 박사장과 연교에 대해 넉넉한 벌이와 훌륭한 성품을 두루 갖춘 인물들이라 평하며 그들을 칭찬합니다. 이에 충숙(장혜진)은 그들이 착한 이유는 그들이 부자이기 때문이라는 다소 이상한 논리를 펼치며 대답하죠.
  ‘부’와 훌륭한 성품을 연결시키는 충숙의 논리는 개개인의 특성을 그 개개인이 속한 계급의 특성으로 돌려 생각해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언뜻 보면 오류 투성이의 논리처럼 보이지만 핵심은 기택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이 모두 충숙의 논리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폭우를 맞으며 만약 민혁이였다면 어땠을까 라고 묻는 기우의 말에 기정은 민혁이에겐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며 강하게 내쏩니다. 말하자면 자신들의 수난을 자신들의 계급의 문제로 여기는 방식이죠. 기우 또한 별반 다르지 않스비다. 모든 일이 종결되고 뇌수술을 받은 뒤에 그는 의사 같지 않은 의사와 경찰 같지 않은 경찰이 본인 앞에 서있었다고 서술합니다. 기우 역시 개개인의 특성을 부정하며 머릿속에 확고하게 지정된 본인만의 특정 계급에 대한 인물상이나 사회적 지위의 상이 존재하죠.

 

박사장네 집에서 술판을 벌이는 기택네 가족

  하지만 기택은 그러한 충숙의 논리에 동의하지 못합니다. 그는 밑의 계급은 무식하고 천하며 부당한 일을 겪어야 하고 위의 계급은 고결하고 하층 계급과 모든 면에서 반대일 것이라 단정 짓는 1차원적인 계급론에 반대합니다. ("아내를 사랑하시죠?"라고 묻는 그의 말엔 너나 나나 결국엔 한 가정의 가장이지 않느냐라는 동등함을 주장하는 뉘앙스가 서려있다.) 기택이 충숙의 말에 동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후에 본인을 바퀴벌레에 비유하는 충숙의 말에 크게 분개한 이유이기도 하죠. (영화는 해당 장면을 기택의 장난처럼 묘사했지만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하기 이전에 그의 뒷모습을 보여주며 진짜 감정을 괄호 친 것으로 보아 이는 기택이 정서적으로 크게 타격받은 장면의 일환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러나 씁쓸하게도 영화를 보고 있으면 요즘 세상은 그 어이없게 들리는 충숙의 말이 오히려 더 그럴듯한 것 같습니다. 기택은 박사장네 집에서 술을 마실 땐 비 오는 밖을 바라보며 운치에 감탄하지만 동일한 폭우에 잠겨버리는 본인의 원래 거주지로 돌아옴으로써 개인의 잘잘못이 아닌 개인이 어찌할 도리가 없게끔 계급이 단호히 결정지어버리는 비정한 결과론을 몸소 체감합니다. 이전에 기정을 향해 정말 여기 사는 사람 같다고 말하는 기우의 대사가 이 이상한 논리에 그럴듯함을 더합니다. (여담으로 후에 박사장이 갑작스레 들이 닥칠 때 기우가 정말 바퀴벌레처럼 네 발로 기어 도망가는 장면은 참으로 웃긴 동시에 씁쓸할 따름이다.)

 

번개모임을 주도하는 연교

  박사장 또한 충숙과 유사한 논리를 펼치며 기택의 분노를 쌓습니다. 기택에게 지하철 타는 사람들의 냄새가 난다며 뒷담화를 하는 박사장의 말에는, 기택이 싫어하는 개인을 계급으로 묶어버리며 비판하는 논조와 인간적으로 가장 수치스러울 만한 폭언이 모두 담겨있는 셈이죠. 그리고 그 순간 탁자 밑에 숨어 자식들이 있는 앞에서 그 말을 그저 듣고 있을 수밖에 없는 기택의 무력감은 대폭 증가합니다. 마침내 피가 난무하는 살육전이 발생하는 당일에, 영화는 가혹할 정도로 기택을 공격하죠. 그가 아들에게 계획의 무용함에 대해 주장하던 전날 밤에 이어 다음날 날이 밝자 그는 연교의 부름에 곧장 달려가죠. 연교가 속칭 번개모임이라 일컫는 약속은 미리 계획되어 있지 않고 급하게 잡힌 모임을 뜻합니다.

 

연교가 기택의 몸 냄새 때문에 창문을 열고 혐오스러운 태도를 내비치자 기택은 심기불편한 표정을 짓는다.

  계획이 의미 없는 자는 계획이 필요 없는 자의 분부를 받들며 더더욱 무력해집니다. 마트에서 카트를 끌며 마치 하인처럼 연교를 뒤따르는 것에 이어, 차에서 연교가 기택의 가족에겐 끔찍하기 그지없었던 바에 대해 감사함을 표하며 그의 냄새를 혐오하는 태도를 취할 때, 비로소 기택의 무력감은 분노가 됩니다. 이렇게 연쇄적으로 그의 모멘트가 쌓인 와중에 박사장이 그에게 거듭 계급적 박탈감을 주며 또다시 냄새와 관련된 그의 수치심을 자극했으니 더 이상 기택의 우발적 살인에는 별다른 부가설명이 필요가 없어지죠. (여기에 칼에 찔린 기정을 두고 제 살길만을 찾아 도망가는 주변 인물들의 모습은 하층의 고통에 무감한 상층이란 주제를 더 공고히 하며 이야기 내적으로는 기택의 분노에 더더욱 열을 가한다. 다른 요소들을 다 차치하고, 무력이란 감정을 환멸의 감정으로 탈바꿈시키며 클라이맥스에 종지부를 찍는 송강호의 클로즈업은 그 자체로 영화의 개연성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였다 봐도 손색이 없다.)

 

  분명 기택의 살인을 정당화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택의 극단적 행위와 그 전까지의 과정들은 상류층의 악의 없는 행동들이 어떻게 하류층의 수치심을 팽창시키는지를 환기하며, 동시에 계급과 사회적 차별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둔감했는지, 혹은 민감한지를 판가름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읽어도 좋을 법만큼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남다릅니다. (근세와 문광을 포함한 모든 하층계급은 상층계급을 절대적으로 숭배하고 반대로 상층계급은 아래 계급을 철저히 내리 깔본다. 그 가운데, 개인은 계급이 아닌 개인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지당한 생각을 가진 인물이 비인간적 행위의 주체가 돼버리는 영화의 서사는 인지상정의 마음이 더는 통용되지 않고 다수의 비정상으로 인해 소수의 정상이 비정상으로 내몰리고 있는 현 사회의 축약본이 아닐까? 뭣보다도, 기택이 그리도 강조한 무계획의 산물이 결국에 우발적 살인으로 구현된 것이 가장 가슴 아픈 대목이다. 분명 박사장은 죽을만한 짓을 하지 않았고 결정적 잘못을 한건 기택이지만 이상하게 기택에게 더 마음이 가는 건 묘한 감정적, 윤리적, 더 나아가 계급적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기택의 살인은 영화의 서사적으로나 주제적으로나 상당히 중요한 행위로 보입니다. <기생충>은 얼핏 보기에 ‘상’과 ‘하’ 양쪽 사이의 암투처럼 보였지만 실은 서로 ‘하’를 독점하려 드는 ‘하’와 ‘최하’의 비열한 주먹다짐에 가까웠습니다. 이러한 영화의 구조에서 박사장에 대한 기택의 공격은 ‘상’에 대한 ‘하’의 유일한 공격으로 기록되죠. 아마 대부분의 관객이 박사장의 삶보다는 상대적으로 기택의 가족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을 것이고 또한 영화가 기택의 가족을 필두로 진행되기에 기택의 살인은 관객에게 상당한 당혹감을 선사하긴 하지만 동시에 일말의 카타르시스를 안겨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순간의 해소감이 기택을 궁극적으로 이끄는 것은 지하의 자리입니다. 기택은 본인의 우발적 행위로 인해 ‘하’의 자리에서 ‘최하’의 자리로 처박히게 됐고 이는 ‘상’에 대한 ‘하’의 공격은 한낱 객기에 지나지 않을 뿐임을 그대로 증명하는 셈입니다. 기택이 근세가 담당해온 최하의 자리를 대체한 것에 이어 박사장의 집 또한 누군가에게 팔리면서 단지 대상이 바뀌었을 뿐 결국에 ‘최하’가 ‘상’에게 기생하는 체제는 보란 듯이 되풀이됩니다.

 


 

" 꽤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상하 수직 관계 "


근세가 보내는 모르스 부호를 해석하지 못하는 다송

  사실 기택이 박사장을 공격하기 이전에도 ‘상’에 대한 아래 계급의 작용은 존재했습니다. 그 작용에 해당하는 것은 공격이 아닌 도움의 요청이었죠. 영화의 계급 상에서 최하층에 위치하는 근세는 박사장에게 몸소 존경을 표하며 동시에 모르스 부호를 알지도 모르는 다송에게 구조를 요청합니다. 그러나 다송은 근세가 이마에 피를 흘려가면서까지 온몸으로 간절히 보내는 구원의 신호를 해석해내지 못하죠. 해석에 어려움을 겪자 곧바로 잠을 청하는 아이의 모습은 ‘최하’의 고통에 대한 ‘상’의 무심함과 좀처럼 소통이 불가하며 좁혀지지 않는 양 계급간의 간극을 동반합니다.(후에 유사한 계급인 기택과 기우는 동일한 방식으로 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다혜

  영화는 사실 훨씬 전부터 양 계급 간의 넓은 간극을 여러 차례 보여준 바가 있습니다. 기정이 처음 저택에 들어왔을 때, 모든 내막을 아는 기정과 기우의 상태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연교 그리고 다혜의 상태는 서로 정보의 비대칭을 이루며 그 연장선상에서 기정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다혜의 표정은 우리에게 기정의 정체가 탄로 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자아내죠. 그러나 이어지는 씬에서 드러나다시피 다혜의 의미심장한 표정에 담겨있던 건 기정의 정체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가 아니라 사춘기 나이 특유의 시기 어린 질투심이었습니다. 자신들에 위협을 가하는 자들의 존재를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다혜의 모습을 시작으로 영화는 양 계급 간의 틈을 점점 벌려나갑니다.

 

팬티를 어떻게 까먹고 갈 수 있냐며 의심하는 동익. 그러나 그의 귓속말에선 뜬끔없이 코카인같은 마약 얘기가 나온다.

  이어지는 장면에선 박사장이 이를 증명해 보입니다. 박사장이 기정이 몰래 벗어둔 팬티를 미심쩍게 여기며 이에 대해 본인 생각을 연교에게 속삭이는 대사는 순간 무음으로 처리되며 우리에게 이전과 비슷한 유형의 긴장감을 일시적으로 불러일으키죠. 그러나 우리는 곧이어 박사장 역시 한참을 잘못 짚고 있음을 마약과 관련된 연교의 대사에서 재차 확인합니다. 박사장이 연교의 귀에 속삭이기 직전에,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후에 공개될 무시무시한 어둠의 지하를 포커싱하죠. 진짜 위험은 본인들의 코앞에 도사리고 있지만 박사장과 연교는 이에 대하여 철저히 무지한 것입니다. 이처럼 박사장 네 가족은 본인들을 은근슬쩍 갉아먹는 ‘하’의 인물들의 의중을 모를뿐더러 ‘최하’에 속하는 인물들에 대해선 그 존재의 유무조차 인지하지 못합니다. 양 계급 간의 간극이 명확해지는 순간이죠.
  이후에도 영화는 하류층의 얍삽함에 부주의하게 처사하는 상류층의 모습으로 영화의 텐션을 유지합니다. 몰래 숨어있는 가족들이 걸릴 듯 말 듯 긴장감이 팽팽한 중반부의 시퀀스에서, 기택의 가족들은 죄다 상류층의 발밑으로 피난하며(가령 기정이 숨은 탁자 밑이나 기우가 숨은 침대 밑) 우리에게 계급적 차이를 재차 환기 시킵니다. 그리고 박사장 네 가족들은 여전히 이들의 존재조차 눈치 채지 못하죠. 이 밖에도,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명확한 소통이 불가한 첫 만남에서의 기택과 박사장의 모습처럼 계급 차에 관한 유사한 맥락이 조금은 다른 형태로 구현된 사례도 있습니다. 마치 가량 비에 옷이라도 젖게 하듯 세세히, 그리고 세밀히, 영화는 계급적 간극을 점차 형성해 왔습니다.

 


 

" 다송이가 해석하지 못한 모스 부호 "


인디언 복장을 착용한 다송이

  양 계급 간의 간극차이에 명확함을 더해준 다송이에 대해 조금만 더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저 천진난만하고 순수하게만 보이는 다송은 실은 굉장한 모순적으로 조형된 캐릭터입니다. 인디언 코스프레를 하는 다송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인디언과 관련된 역사적 전례를 상기시켜 양립과 공생이 불가능한 두 계급간의 형국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죠. 이런 1차원적으로 보이는 이 비유는 스쳐 지나가는 듯 보이는 연교의 대사를 업으면 그 의미가 보다 더 다채로워집니다. 인디언 복장을 미국에서 직구한 것이라 툭 내뱉듯 기우에게 던지는 연교의 대사는 상당히 아이러니하죠. 그렇다면 결국 다송이 입고 있는 인디언 의상은 과거에 인디언을 쫓아낸 미국이 상품화를 위해 모조로 생산한 옷이란 말입니다. 다송의 인디언 코스프레는 진지하게 약자를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약자를 착취한 전례가 있는 강자의 코스프레를 이중으로 코스프레한 것으로 해석되죠. 부실해 보이는 겉과 다르게 방수의 기능까지 두루 갖춘 다송의 텐트는 그 자체의 성질로서 캐릭터와 캐릭터가 대변하는 계급의 모순적 특징을 몸소 말해주고 있는 셈입니다.
  결국 ‘최하’는 ‘상’에게 배반당한다. ‘상’은 여전히 ‘최하’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이 조금은 슬프죠. 더더욱 슬픈 건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진흙탕 싸움은 온전히 ‘최하’와 ‘하’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공허하기 짝이 없는 피바다 소동을 기택이 ‘상’을 공격하는 의외의 행동으로 마무리해 보지만 결과는 알다시피 참담할 뿐이죠. 이러한 참극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선 ‘하’와 ‘최하’의 공생이 필수적인 덕목으로 강조되는 부분이지만 요즘의 세상엔 도통 통용되기 쉽지 않은 교훈입니다. 여기에 <기생충>의 가장 큰 무력감이 있습니다.
  감독의 전작인 <괴물>에서, 박해일이 연기한 남일은 여기저기서 버림받고 배신당하다 결국 노숙자에게 손을 내밀어 도움을 받게 되죠. 비교적 근작인 <설국열차>에서도 봉준호 감독은 두 계급 간의 암투를 다루었으나 상층계급에 저항하는 극 중 하층계급 간의 연대하나는 무척이나 끈끈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서로 연대한다는 설정은 <옥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그러나 <기생충>은 이와 정반대의 태도를 취합니다. 세상이 어두워짐에 따라 감독의 시각 또한 어두워졌던 탓일까요?

 

cctv 선을 자르고 한밤중에 박사장 저택에 찾아온 문광

  <기생충>에선 오히려 도움이 절실한 이들이 서로를 갉아먹으며 피 튀기게 싸운다는 것이 영화의 핵심설정입니다. 지하에서 문광이 진심으로 충숙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기정이 지하에 있는 근세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려 갈 뻔했을 때, 혹은 (핵심 사건과는 다소 무관하지만) 폭우에 짐을 옮기는 것을 이웃주민이 기택에게 도와달라고 말할 때 등등, 이 순간마다 이유 모를 자의나 타의, 혹은 우연 등이 개입해서 서로 간의 공생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줄곧 약자들의 연대에서 희망을 발견해왔던 감독의 암울함을 확인하는 순간이자 <괴물>에서 13년이 흐른 지금의 쓸쓸한 사회상을 마주하는 순간이죠. 만약 봉준호 감독이 요즘 시대상을 반영하여 이 시점에서 <괴물>을 다시 찍는다면 초반부에 괴물이 시민들을 습격하는 시퀀스에서 강두(송강호)가 아무런 이유 없이 시민들을 도와주는 장면과 후에 노숙자가 남일을 도와준다는 설정은 필히 수정이 요구됩니다.

 

박사장을 죽이고 나서 몰래 차고 계단을 통해 근세가 머물었던 지하공간으로 향하는 기택

  그러나 흥미로운 건 우연이 개입하여 누군가를 도운 사례가 드물지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기택이 박사장을 살해하고도 잡히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문광이 사전에 cctv의 선을 잘라놓았기에 가능했죠. 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문광으로 인해 그 지하공간을 사전에 알아두었기에 가능한 탈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앞선 상황에서 근세가 그토록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고 요청을 받는 다송 또한 근세의 요청을 해석하려는 의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의 소통이 불가했던 것을 확인한 바가 있었죠. 그러나 영화의 말미에서 확인되는 건 자의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우연으로 발생한 문광의 도움입니다.

 

모르스 부호를 전달할 수 있는 박사장 저택의 전등

  기택과 기우가 편지로 서로 소통하는 장면도 이 기묘한 희망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사실 기택과 기우는 서로 쌍방향적인 소통을 할 수 없죠. 기택은 기우에게 본인의 말을 전할 수는 있지만 그 말이 전해졌는지 그 여부조차 알 수가 없고, 기우는 기택의 말을 전달받을 순 있지만 본인의 말을 기택에게 전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편집과 보이스오버의 힘을 빌려 이러한 현실적 한계를 최대한 줄여나가는 방식으로 씬을 구성했죠. 기택의 모스 부호 신호를 하나하나 해석하던 기우의 목소리는 자연스레 본인의 편지를 읽는 기택의 목소리로 전환되고 그 목소리는 자신이 쓴 답장을 읽는 기우의 목소리로 재차 전환됩니다. 짐작컨데 기택은 기우에게 그 편지 한 장을 전달하기 위해서 수없이 밤마다 홀로 모르스 버튼을 눌러댔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영화는 이 또한 편집의 힘을 이용해 기택의 편지가 기우에게 대번에 전달된 것마냥 기택의 헛수고를 잘라냈습니다. 분명히 존재하는 상호 간의 소통 제약을 우리로 하여금 망각하게 하는 영화의 엔딩은 그래도 희망의 불씨 정도는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영화의 소박한 주장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말은 이렇게 하고 있지만 냉정하게 봤을 때 <기생충>은 누군가를 비판하려는 것도, 옹호하려는 것도, 더 나아가 이에대한 특정한 메시지를 설파하려는 것도 아니죠. 설령 메시지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희망보다 비관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 수석의 의미 "


민혁으로부터 수석을 받는 기택

  영화는 특정 메세지를 전달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넓은 상층과 하층 사이의 간극과 하층계급에서 강요되고 있는 서로에 대한 불신과 무의미한 권력다툼이라는 현실을 우리에게 직시하는 것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박사장 네 집이 누군가에게 팔려 그 구조가 다시 유지된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하강하는 엔딩의 카메라는 오프닝과 동일한 감각을 줌으로써 기우네 집(혹은 기우가 속한 계급의 체계 ) 또한 그 체계가 다시 유지되었음을 말합니다. 심지어 영화 내내 의미심장하게 등장한 수석마저 원래의 자리인 자연으로 되돌아 갑니다.

 

할아버지의 수석을 가지고 온 민혁

  수석은 말 그대로 그저 돌에 불과하죠. 그런데 <기생충>의 인물들은 이 수석에 대해 저마다의 의미를 계속 부여합니다. 예컨대 민혁(박서준)은 “이 돌 때문에 너희 부모님 얼굴 한 번 뵌 거지.”라 말하고, 이어서 기우는 폭풍우 치는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기어코 돌을 건져내며 돌이 운명처럼 본인에게 들러붙은 것이라 말하죠.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아무것도 아닌 돌에 재물 운이라는 의미를 갖다 붙인 민혁의 할아버지 세대라는 이 뜻 모를 의미부여의 첫 주자가 있습니다.
  앞서 인디언 모티브에 대하여 연교가 지나가듯 툭 내뱉는 대사로 의미를 다채롭게 하였듯 영화는 수석의 모티브 역시 민혁의 무심한 대사로 외연적 의미를 확장시킵니다. 스쳐가는 민혁의 대사에서, 우리는 민혁의 할아버지가 육사 출신임을 확인활 수 있죠. 추정컨대 그 시절의 육사 군인 세대라면 경제 개발 계획이란 거창한 플랜을 급진적으로 추진한 세대임이 분명하다. 여기서 다시 계획이란 모티브로 의미의 가지치기가 들어갑니다. 민혁의 할아버지 세대가 추진한 경제 계획은 한국 현대사에서 손에 꼽힐 만큼의 거창한 계획입니다. 민혁의 할아버지는 그 누구보다 계획이 중시된 사회를 살아온 세대인 것이죠. 그러나 그 시절의 계획이 성공됐는지 실패했는지의 여부를 떠나, 분명한 건 현시점의 기택네 가족에게 계획이란 쓸모없는 것 정도에 그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택네 가족은 강박적으로 계획을 세우며 살아야 함을 신조처럼 되뇌며 살죠. 그 윗세대의 영향이 아래 세대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왔음을 보여주는 방식입니다.

 

기우: 이거요... (돌을 보며) 얘가 나한테 달라붙는 거예요.

  의미부여의 대물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윗세대가 재물 운에 관련된 것이라 지정한 돌에 대해 아래세대는 여전히 그 돌이 재물 운에 관련된 돌, 혹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 돌은 결국에 기우가 근세를 해하려 다짐할 때 무장한 무기로 사용되었고, 더 정확히는 근세가 기우에게 치명상을 입힌 무기로 사용되었죠. 계획의 유용함의 측면에서나, 의미부여의 측면에서나, 더 이상 구세대의 가르침이 현세대에 통용되지 않고 있음을 우리는 수석을 통해 쓸쓸히 확인합니다. 영화를 다 본 뒤 의미를 곱씹을 때 무기력한 감정이 추가로 더해지는 대목이죠. 이 무기력함의 가운데에서 기우는 본인이 그 집을 살 테니 기택에게 계단만 올라오면 된다고 말합니다. 기우는 기택에게 “그 날이 올 때 까지”라 말하지만 과연 그날이 오기는 할까요? 봉준호 감독이 심심풀이로 계산한 결과, 산술적으로 500년이 걸린다는 그 기약 없는 미래는 우리를 다시금 무력하게 만들지만 어찌 됐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는 영화가 만든 실낱같은 희망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뿐입니다.

 

한 줄 평가: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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