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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ood Movies/SF

<애드 아스트라> _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우주여행

by 브리즈B 2020. 3. 12.

< 애드 아스트라, 2019 >

 

감독: 제임스 그레이

출연: 브래드 피트

개요: SF / 브라질, 미국 / 인생, 잔잔한, 여행

 

미 육군 소령

'로이 맥브라이드'(브래드 피트)는

우주의 지적 생명체를 찾기 위한

'리마 프로젝트'를 수행하다가 

실종된 아버지를 영웅이라 믿으며

우주 비행사의 꿈을 키웠다.

 

어느 날, '로이'는

이상 현상으로 우주 안테나에서 

지구로 추락하는 사고를 당하고 

인류를 위협할 전류 급증 현상인

이 '써지' 사태가

자신의 아버지가 벌인 위험한 실험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과 함께

그를 막아야 한다는 임무를 맡게 된 '로이'는

우주로 향하게 되는데...

 


 

" 애드 아스트라 짚어보기 "


  제임스 그레이의 이 훌륭한 SF 대작은 느림과 지루함이 같은 의미의 말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일깨워 줍니다. 본 영화의 종반부는 개인마다 다르게 느껴지지만 우리가 흔히 대작 SF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기대하는 것, 소위 말해 비주얼 상으로 두드러지는 무엇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심리적 긴장감이 팽팽한 까닭에 시시하고 볼품없다는 인상이 적습니다.
  다소 섣부른 판단이긴 하지만 아마도 <애드 아스트라>는 훗날 대중 영화의 화법으로 가장 깊이 주제를 탐구하고 파고든 하나의 사례로 종종 언급될 것 같습니다. <애드 아스트라>의 가장 놀랄만한 요소 중 하나는 유사한 장르의 선배 영화 격에 해당하는 영화들이 다뤄온 흥미로운 모티브를 그대로 행하면서도 본인만의 오리지널리티를 선명하게 구축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애드 아스트라>는 어디서 본 것들로 가득하지만 어디서 본 적 없는 유형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주의 ※

본 포스팅은 지극히 개인적인 리뷰이며 

단순히 제 의견이 틀리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것을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다소 부족하지만

다름을 근거로 한 냉정한 비판은 괜찮으며

본 리뷰에 앞서 영화 내용을 다룰 것이기 때문에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신 분들은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읽어주시기를 권장합니다.

 

" SF 유니버스 사이의 연결점 "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틸컷

  본 영화를 위해 제임스 그레이가 취사선택한 모티브의 원형 격에 해당되는 영화들을 하나 둘 보고 있자면 이는 꽤나 무모한 시도로 느껴집니다. 그레이가 직접 언급한 영화들, 혹은 그가 직접 언급하진 않았으나 관객의 눈에 선히 보이는 본 영화의 레퍼런스들은 이미 고전이나 명작의 반열에 오른 것들이 대다수이죠. 단순히 생각나는 대로 열거해보면 플롯의 측면에서, 여러 행성의 단계를 밟아가며 점층적으로 어떠한 변화를 맞이하는 본 영화의 플롯은 명백히 우리에게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강하게 상기시킵니다. 또한 주제와 인물의 동선을 고려한 플롯의 측면에서 바라봤을 때 <애드 아스트라>는 지상에서 인간관계의 무력함에 지쳐 삶의 의미를 상실한 인물이 우주 너머에서 성장한 뒤 다시 지구로 귀환해 새로운 탄생을 맞이하게 된다는 또 하나의 <그래비티>로 귀결되지요.

 

영화 <퍼스트맨> 스틸컷 속 주인공 '닐'

  캐릭터의 측면에선 영화 몇 편이 연상됩니다. 바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인터스텔라>와 데미언 셔젤의 <퍼스트 맨>입니다. <애드 아스트라>의 로이(브래드 피트)는 아버지에게 버림 아닌 버림을 받아 그를 그리워하며 동시에 원망하는 양가적인 태도를 취하는 <인터스텔라>의 쿠퍼의 아들과 비슷한 면모가 있으며, 직업적 능력과 대인관계 능력이 반비례하며 끝끝내 일과 가정 사이의 이상적인 합일점을 찾지 못했던 <퍼스트 맨>의 닐과 굉장히 닮았습니다. 추가로 인류 전체를 위한 과업을 다룸에도 이에 눈을 돌려 오직 인물의 내면만을 똑바로 응시하는 영화의 화법조차도 <퍼스트 맨>을 연상시키죠.

 

영화 <애드 아스트라> 스틸컷

  위의 영화들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애드 아스트라>는 브래드 피트라는 스타 배우가 출연하는 또 하나의 그저 그런 대작 블록버스터 영화 한 편이 아니라 이전에 감독에게 다양한 경로로 자극을 주었던 예술들의 각종 모티브가 영화 전반에 관철되어있는 상당한 야심작이고 봅니다. 그렇다면 영화의 성패를 결정짓는 건 다음과 같지요. 과연 <애드 아스트라>는 숱하게 반복되어온 유사 장르내의 관습들을 배합하고 다양하게 변주하여 다른 영화들과 있어서 본인만의 차별성과 개성을 획득하였는가? 아래의 내용은 이러한 질문에 있어 철저히 그러하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 애드 아스트라가 유독 특별한 이유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인류 진화를 뜻하는 '모노리스' (가운데 직사각형의 검은 돌기둥)

  플롯의 유사함과 더불어 느린 시각 스타일마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비슷한 <애드 아스트라>이지만 둘은 절대 무시하지 못할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두 영화는 변화의 주체가 다릅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인류가 변하는 케이스인데 <애드 아스트라>의 경우엔 인류가 아닌 한 명의 인간이 변합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주인공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지만,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핵심은 개인이 아닌 개인이 종속되어 있는 거대한 이야기의 구조 그 자체에 더 가까이 있습니다. 그러나 <애드 아스트라>를 본 관객이라면 로이 라는 극중 인물을 잊을려야 잊을 수가 없죠. <애드 아스트라>는 로이의 내면에 대한 변화 관찰기라 봐도 무방합니다.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모노리스가 인류 진화의 발판처럼 제시되었던 것과 유사하게 <애드 아스트라>에서 모노리스 역할을 대신 수행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입니다. 달에서 화성, 그리고 해왕성까지. 각 행성에서 프루이트(도날드 서덜랜드), 헬렌(루스 네가), 클리포드(토미 리 존스)가 로이의 내적 성장의 발판으로서의 역할, 즉 모노리스와 비슷한 진화의 기능을 담당합니다.

 

영화 <그래비티>의 주인공 '라이언' (산드라 블록)

  개인적으론 본 영화에서 인간이 모노리스의 역할을 수행한 것 또한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다소 견문이 좁지만 핵심적인 예기를 꺼내보자면 인간은 자고로 관계 맺음의 생명체입니다. 인간이라는 낱말을 구성하는 ‘사람 인’과 ‘사이 간’의 한자어 자체가 이에 대한 근거입니다. 그런데 로이는 뛰어난 직업적 능력과는 다르게 관계에 있어서 철저히 무능력합니다. 동료들을 대할 때 일종의 사회적 가면을 쓰고 일관하는 그의 모습과 결별한 그의 아내는 그 자체로 실패한 관계의 산물입니다. 그런 그에게 있어 변화, 혹은 내적 진화를 가져다 줄 마땅한 무엇은 당연히 인간이어야 하고, 영화가 그의 변화 기를 담았다는 것은 관계 무능력자가 비로소 관계에 손을 내밀게 되는 과정을 담았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죠. 마치 영화 <그래비티>의 라이언처럼.
  오프닝 무렵에 아찔한 시각효과 시퀀스를 배치한 것과 더불어 오프닝의 사고로 인해 우주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인물의 상황, 거기다 비슷한 내적 성장을 경험한 뒤 다시 지구에 귀환하게 되는 인물의 동선까지. 어쩌면 <애드 아스트라>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보다 <그래비티>와 접점이 더 많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관계 무능력자인 <그래비티>의 라이언도 변하고, <애드 아스트라>의 로이도 변하죠. 하지만 이번엔 두 영화는 변화의 형식이 다릅니다. 예컨대 라이언은 관계의 부재로 관계의 소중함을 깨닫는 케이스고, 로이는 관계를 몸소 경험함으로써 관계 맺음의 유의미함을 터득하는 경우라고 봅니다. 라이언은 망망대해와도 같은 우주를 홀로 유영하며 외로움이라는 단어의 본질에 점차 가까워지죠. 그녀가 지구로 귀환한 선택은 관계의 부재가 가진 외로움을 절감한 이가 행한 반작용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출처: 이십세기폭스 코리아 네이버 포스트

  결국 라이언과 로이 모두 관계 맺음이 필연이 될 수밖에 없는 지구라는 곳으로 귀환합니다. 그런데 같은 공간을 택했음에도 불구하고 로이의 여정은 라이언과 달리 끝없는 관계 맺음의 연속이라고 봅니다. 자신을 감시하라는 명을 받은 프루이트의 뜻밖의 호의, 거기다 아버지의 살해에 대한 명백한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선의를 베풀며 유대감을 내비치는 헬렌까지, 로이는 이들에게 관계를 학습해나갑니다. 흥미로운 건, 그에게 있어 관계의 반면교사(다른 사람이나 사물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가르침을 얻는다는 뜻)의 역할로서 작용하는 이들 또한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 사회 "


자신이 미끼임을 알게 된 로이

  두말할 것도 없이, 극 중 프루이트와 헬렌, 그리고 로이와 그의 아버지인 클리포드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꽤나 전체주의적인 사고로 일관합니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나머지 인물들의 캐릭터 라이징을 배재하며 그들을 권력의 하수인과 유사한 존재로 치환하죠. 여기서 로이의 내면이 요동쳤던 순간을 한 번 곱씹어보면 아버지의 영웅담이 죄다 허상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자신이 아버지를 살해할 국가의 임무의 미끼로 이용됐을 때, 로이는 심히 흔들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후에 일어날 정지된 노르웨이 우주선에서 일어난 유인원과의 에피소드를 경유하여 영화는 로이의 심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합니다.

 

우주선에 방치된 흉포한 유인원이 로렌스 선장을 물어뜯는다

  아버지를 찾기 위해 해왕성으로 향하는 우주선은 도중에 구조 요청을 보낸 노르웨이 우주선 곁에 도달합니다. 여기서 로렌스 선장은 얼른 도와주자며 휴머니즘 성격을 보이고, 반면에 로이는 더 큰 임무를 위해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며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면모를 보입니다. 결국 로렌스와 로이는 노르웨이 우주선 안으로 들어가고 여기서 로렌스 선장은 흉포한 유인원에게 당하죠. 사건이 발생한 직후에, 그는 유인원의 분노를 목격하였다고 내레이션을 통해 서술합니다. 여기서 로이의 생각은 변화를 맞습니다. 그런데 다소 기이하게 다가오는 건 다음과 같은 그의 말입니다. “나는 그들의 분노가 이해가 갔다.” 대체 로이는 어찌하여 죽은 동료가 아닌 동료를 살해한 유인원의 심정을 이해했던 것일까요. 그건 아마도 피실험자 간의 우연찮은 유대감이 아니었을까?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도 인류문명을 위해 철저히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유인원과 인류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미끼처럼 소비되는 로이는 사실 상 별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말하자면 그 순간 로이가 이해한 유인원의 분노는 종에 대한 개체의 분노이며 전체에 대한 개인의 분노입니다.
  명백히 집단에서 돌출된 모습을 보이는 프루이트와 헬렌을 로이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까닭은 이들과 대조되는 집단의 폐해 덕분입니다. 로이는 결과 중시 집단의 모순을 깨닫고 과정을 중시하는 이들의 미덕을 학습합니다. 헛된 이상을 포기하고 가정을 지킨 프루이트, 가해자의 아들로 봐도 무방한 로이에게 피해자 간의 유대감을 전달했던 헬렌. 전체주의 집단이 절대 가르칠 수 없었던 것이자 가정을 지키지 못하고 관계에 미숙했던 로이에게 절실히 요구되었던 덕목입니다.

 

명예의 전당에 오른 로이의 아버지 '클리포드'

  간과하고 넘어가도 무방한 부분이라 생각은 든다만, 영화가 앞서 거듭 말했던 전체주의의 집단을 기반으로 암울한 미래의 세계관을 그려나가는 부분 또한 흥미롭습니다. 분명 <애드 아스트라>의 세계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죠. 그런데 기묘하게도 <애드 아스트라>엔 과거를 복기시키는 요소들이 가득합니다. 우선, 앞서 수차례 강조했던 집단의 성향이 가장 직설적인 예시입니다. 극 중 우주선의 선원들은 로이를 만날 때마다 당신의 아버지는 영웅이었다며 그를 반기죠. 그러나 영화의 절반만 보아도, 사실 이건 잔혹 무도한 살인자를 영웅으로 둔갑시켜 집단이 개인에게 세뇌시킨 결과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후에 일이 틀어지자 선원들이 로이를 대하는 태도 또한 다분히 전체주의적이며 파시즘을 연상시키죠. 예정된 목적에 있어 로이가 방해물이 돼버리자, 그들은 이전에 보였던 존경심은 뒤로하고 그를 제거하려 애씁니다. 집단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영웅을 조작하며 거짓 세뇌를 하는 행위, 목적에 해가 되자 개인의 안위 따윈 전혀 고려치 않고 제거를 결단하는 행위. 우리는 미래에도 과거의 악한 사상이 되풀이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른쪽에 있는 우주 해적으로부터 습격을 받다

  공간에 측면에서 바라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달에서의 자동차 추격전의 경우, 우리는 해당 장면을 바라보며 묘한 신선함을 느끼는 동시에 다른 한 편으로 묘한 친숙함을 느낍니다. 분명 우주에서 총을 쏘며 자동차로 추격하는 구도는 익숙지 않은 것인데, 달리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지구에선 많이 본 구도입니다. 즉, 공간은 달라졌으나 인물들의 행위는 변치 않았다는 것이죠. 개인의 생존을 위해 약탈을 서슴지 않는 무법의 행위는 서부개척 시대에서 족히 백여 년이 넘게 흐른 <애드 아스트라>의 시대에서도 반복됩니다.

 

달 기지 내부 모습. 로이는 꽤 지루해 보인다

  로이가 처음 달에 도착했을 때, 우리에게 이이 지구인지 달인 지를 의심케 하는 익숙한 광경이 펼쳐지죠. 그리고 이어서 이와 유사한 맥락을 부언하는 로이의 내레이션이 흐릅니다. 지구에서 지긋했던 광경이 여기서도 똑같이 보이고 있다고. 말하자면 <애드 아스트라>는 널리 퍼져있는 동시에 영원히 계속되고 있는 악습의 굴레에 놓인 개체가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에 대해 묻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은 고대 시대부터 철학자들이 계속 고민해오던 근본적인 질문이죠. <애드 아스트라>는 표면적인 면에서 "고독과 외로움에 사로잡힌 로이가 관계를 회복하는 이야기"로 볼 수 있고, 더 나아가 심층적인 면에서 "내가 믿는 삶의 가치가 사라지거나 없다고 밝혀질 때 어떻게 견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 대우주를 경유한 끝에 도달한 내면의 소우주 "


로이는 아래에서 위를 향해 올려다보며 드디어 아버지를 만난다

  로이는 답을 찾고 싶어 합니다. 인류를 구원할 종이로서의 답이 아닌 개체로서의 답을 원합니다. 이런 와중에, 로이의 아버지 클리포드는 로이에게 나름의 해답이 됩니다. 마침내 로이가 해왕성에 도달하여 아버지를 만날 때, 다소 이질적인 프레임 구도가 제시됩니다. 관객들이 기다리던 로이의 아버지를 마침내 등장시킬 때, 뒷모습에서 앞모습의 전환으로 인물을 공개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일 테지만 제임스 그레이는 생뚱맞게도 클리포드를 로이의 머리 위에서 등장하도록 합니다.

 

지구로 돌아와 심리테스트하는 로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겨도 되는 부분일 법도 하나, 개인적으로 이렇게 세밀하고 정교한 영화를 만든 제임스 그레이가 이토록 중요한 인물의 등장 구도를 대충 처리했을 리가 없다고 봅니다. 로이와 클리포드가 종적인 프레임 구도 내에 엮여있다는 것은 두 인물을 통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시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클리포드는 로이의 미래라고 봅니다. 직업적 과업에 전념하여 가정을 지키지 못했던 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선원을 죽이고 홀로 우주를 항해하는 일. 로이는 영화 내내 아버지의 과오를 그대로 따릅니다. 세대를 관통한 이런 악습의 반복 끝에서, 로이는 클리포드를 통해 자신의 예정된 추한 말년을 내다봅니다. 로이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죠. "나는 단 한 번도 너의 알량한 꿈에 신경 쓴 적이 없어." <애드 아스트라>는 그 한 마디를 듣기 위해 해왕성까지 왕복해야 했던 인물의 순례기입니다.

 

자신을 그만 보내달라는 로이의 아버지 '클리포드'

  클리포드는 지구로 함께 돌아갈 것을 권하는 로이의 권유를 끝내 거절합니다. 그 순간, 둘은 이전과 다르게 아득한 우주 한 공간에서 수직이 아닌 수평의 구도 내에서 줄 하나에 의지한 채 서로 묶여있죠. 그들은 이제 평행적인 위치에 묶여 서로의 비교대상으로 자리하게 된 셈입니다. 더 이상 클리포드는 로이의 미래가 아닙니다. 로이의 아버지는 자신이 막다른 길에 왔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괴팍한 관계 무능력자에 불과하죠. 반면에 그 순간의 로이는 막다름을 정직히 수용하리라 마음을 먹습니다. 그런 로이는 아버지를 놓아줍니다. 그리고 관계 무능력자가 일평생을 바쳐 연구한 결과물들을 폭파시키고 그 폭파를 동력원 삼아 지구로 향합니다. 이 장면은 다분히 상징적이죠.

 

지구로 귀환한 로이

  그렇게 로이는 관계를 부정하는 자와 관계를 끊음으로써 관계의 행성인 지구로 돌아갑니다. 지구로 귀환한 뒤, 그는 여느 날처럼 심리 테스트에 응하죠. 이전에 아버지를 만나기 전, 로이는 매번 심리 테스트를 할 때, 8.2시간을 잤다거나 심박수가 4.2라는 정확한 숫자의 수치를 말하며 기계적으로 보고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만난 후, 지구에 돌아와서 아무런 악몽 없이 푹 잤다는 보고를 전합니다. 이전의 심리테스트에서 그의 부정적인 본심이 내레이션으로 흘러나왔던 것과는 다르게 엔딩에서 그의 내레이션이 부재하지요. 아마도 그건 사회적 가면을 벗고 새로 태어난 인물이 겉마음과 속뜻이 합일된 진심을 몸소 발화한 첫 순간이라 굳이 내레이션을 통해 부과 설명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애드 아스트라>는 옛것의 익숙한 것들을 비틀어 재조립하면 새것의 신선한 결과물이 나온다는 21세기의 역설을 톡톡히 수행한 영화입니다. 관객에 따라선 해왕성까지 왕복으로 다녀온 결과가 고작 인간관계의 회복이냐며 불만을 표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질문이 거창하다고 해서 그 답변까지 거창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사 로드무비의 형식을 갖춘 본 영화의 핵심은 다른 로드무비 영화들이 그렇듯 역시 과정 속에 있다고 봅니다. 기존의 우주 SF 장르 내에 여러 장르와 모티브를 조합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한 제임스 그레이 본인만의 결과물은 결코 무시하지 못할 하나의 독립적인 작품이죠. 크리스토퍼 놀란이 엄청난 것을 예고한 뒤 엄청난 것을 말 그대로 보여주는 감독이라면 제임스 그레이는 이를 보여주지는 못하더라도 그에 준하는, 어쩌면 그를 능가하는 본인만의 스타일을 느끼도록 해줍니다. 다른 영화, 혹은 다른 감독들과의 비교 이전에, <애드 아스트라>는 그 자체로 독자적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갔습니다.

 

한 줄 평가: 지금까지와 다르게 반대로 항해하는 스페이스 오디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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