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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시 쉬었다 가세요"
The Good Movies/모험

<1917> _ 지도 없이 나아가는 법

by 브리즈B 2020. 3. 6.

< 1917, 2019 >

 

감독: 샘 맨데스

출연: 조지 맥케이, 딘-찰스 채프먼

개요: 모험 / 영국, 미국 / 전쟁, 처절한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7년. 

독일군에 의해 모든 통신망이

파괴된 상황 속에서

영국군 병사 '스코필드'(조지 맥케이)와

'블레이크'(딘-찰스 채프먼)에게

하나의 미션이 주어졌다. 

함정에 빠진 영국군 부대의 수장

'매켄지' 중령(베네딕트 컴버배치)에게

'에린무어' 장군(콜린 퍼스)의 

공격 중지 명령을 전하는 것. 

둘은 1600명의 아군과

'블레이크'의 형(리처드 매든)을 구하기 위해

전쟁터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사투를 이어가는데...

 


 

" 1917 짚어보기 "


  국가 간의 이데올로기 대립이나 인간 사이의 혈투를 주로 다룬 무수한 전쟁영화들과 달리하고 인간과 시간의 대립구도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1917>은 이제껏 다른 유형으로 보였습니다. 사람의 숨통을 점차 조여 오는 시간에 대한 모티브를 원 컨티뉴어스 숏(여러 장면을 이어 붙여 한 장면처럼 보이는 기법)을 이용하여 관객들에게 현장감과 더불어 몰입감을 선사해줍니다. 촬영감독 찰스 디킨스는 이 기법으로 기념비적인 성과를 내놓았다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참고로 이 영화는 감독 샘 맨데스의 할아버지가 직접 들려준 경험담을 기반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마 할아버지께서 '스코필드'(조지 맥케이) 본인인 것 같습니다. 샘 맨데스가 영화를 만들기 위한 소재를 찾기 위해 여러 사람을 만나 물어보고 직접 듣어 보듯이 할아버지한테 들려줄만한 이야기 없냐고 물어봤을 것입니다. 이처럼 샘 맨데스의 할아버지도 과거에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군 병사로 복무했을 당시, 극 중의 스코필드처럼 지도 없이 여기저기 길을 물어보며 나아갔을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완벽한 지도는 없습니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잘못되거나, 오히려 뒷걸음질로 인도합니다. 왜 주인공을 지도를 모르는 사람으로 설정했는지 알아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 주의 ※

본 포스팅은 지극히 개인적인 리뷰이며 

단순히 제 의견이 틀리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것을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다소 부족하지만

다름을 근거로 한 냉정한 비판은 괜찮으며

본 리뷰에 앞서 영화 내용을 다룰 것이기 때문에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신 분들은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읽어주시기를 권장합니다.

 

" 시간이 전달하는 힘 "


 

<1917> 롱테이크 촬영 현장

  <1917>은 원 컨티뉴어스 숏을 고집하며 서사를 끌고 오지만 편집점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참호 속 어둠에 프레임이 가려지는 순간, 폭발로 인해 파편이 튀기는 순간 등등 영화는 다소 고전적인 방식을 통해 관객의 인지를 현혹합니다. 하지만 비록 이러한 눈속임의 과정이 있다 할지라도 공식적으로 <1917>은 두 개의 숏을 가진 영화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머릿속엔 자연스레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자리 잡는데요. 굳이 힘겹게 영화 전체를 롱테이크의 형식으로 찍어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전체를 하나로 찍을 거면 하나로 찍을 것이지 왜 굳이 영화는 무지 화면을 통해 눈에 띄는 편집점을 남겨 영화를 하나의 숏이 아닌 두 개의 숏으로 보이게 한 것일까요.
  아마 샘 멘데스가 해석하는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한, 마치 통제 변인과도 같은 절대적인 조건인 것 같습니다. <1917>의 시간은 인간의 상대적 감각으로 되돌리거나 빨리 감을 수도 없습니다. 즉, 시간이란 개념 자체가 그 자체로 외면할 수 없는 일종의 부조리인 셈이지요. 물론, 그렇다 할지라도 영화 전체를 통일된 숏으로 찍는 건 너무 과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을 법도 합니다. 물론 인정하는 바이긴 하지만 수긍하기 힘든 점이 여럿 있습니다.
  시간을 절대적인 개념으로 바라보는 영화의 전제가 성립되기 위해선 반드시 모든 장면은 단일한 숏 내에 속해 있어야만 합니다. 만약 전장에서의 폭격이나 추격에서의 총격과 같은, 서스펜스나 스펙터클이 강조되는 장면에서만 이를 더 부각하기 위해 롱테이크 촬영을 사용했다면, 그건 촬영의 순간적인 임팩트를 강조하기만 할 뿐인 영화적 기믹(이목을 끄는 행동, 속임수 혹은 흘림수)입니다. 두 주인공이 쓸데없어 보이는 잡담을 나눌 때, 혹은 잠시 앉아 목을 축일 때 등등 이 사소한 순간들까지 롱테이크의 범주 내에 속해야만, 영화 내에서 시간은 그 자체로 인간의 대척점에 놓여 그들의 영속적인 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영화의 기술적 요소는 과시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주제를 위한 일종의 공헌이 되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죽음을 면전에 앞둔 블레이크를 안으며 혼란에 빠진 스코필드

  이 영화의 촬영 기법에 동의할 수 있었던 기점이 된 부분 역시 웅장한 스펙터클의 순간이 아니라 사소한 감정적 순간에 있습니다. 임무수행 도중 갑작스레 블레이크가 전사한 슬픔의 순간에, 영화는 스콧필드에게 애도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지요. 점프 컷이나 무지 화면을 통해 다른 타임라인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영화의 형식은 보통의 영화 같으면 인물을 위로해야 할 타이밍에, 눈물이 나올 듯 울먹이는 스콧필드를 재빨리 총격이 난무하는 전장으로 곧장 밀어 넣습니다. 시간을 적으로 삼는 영화가 시간의 무자비함을 강조하는 영화의 형식을 가장 잘 드러내는 대목인 것 같네요.

 

 

적이 매복 중인 건물로 접근하는 스코필드

  영화의 중반 정도의 무렵에, 적이 매복해 있는 건물 내에서 스콧필드가 총격에 부상을 당하자 영화는 갑작스레 그 순간을 기점으로 숏의 흐름을 뚝 끊어 버립니다. 그리고 스콧필드가 다시 눈을 뜨자 시간은 한참 흘러 새벽을 향하고 그는 다시 움직여 어느 프랑스인의 가정집으로 몸을 피신합니다. 샘 맨데스는 도대체 왜 이 사이에 편집을 결정한 것인가. 딱히 1,2부를 구분 짓는 템포 조절용이라 보기엔 좀 애매한 구석이 있습니다. 

 

 

새벽에 적군한테 쫓기던 중, 스코필드는 우연히 어느 여인의 집으로 피신한다.

  친절한 집주인 덕에 가뭄에 비와 같은 잠깐의 휴식을 보내는 그에게 갑자기 새벽이 다 지나갔음을 알리는 시계종 소리가 들려옵니다. 스콧필드가 적이 매복 중인 집에서 총격을 당해 잠시 기절한 사이에, 아마 꽤 많은 시간이 지체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스콧필드가 총격을 당한 뒤 이어지는 몇 초간의 암전은 사실 상 기절상태의 스콧필드가 그 ‘꽤 많은 시간’을 느끼는 지극히도 개인적이며 상대적인 감각입니다. 시종 이어지는 숏을 통해 극 중 인물의 1분 1초를 곧 관객의 1분 1초와 동일시했던 시간의 절대성을 부각했던 영화는 숏이 끊어지는 순간에 시간의 상대성을 급격히 대두시킵니다.
  스콧필드가 시간을 상대적으로 감각한 것의 결과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입니다. 시간의 상대성으로 인해 그가 적들의 눈을 피해 이동하기에 가장 유리한 시간대인 새벽 시간대가 고스란히 지나가버렸지요. 애초에 스콧필드는 블레이크에게 밤에 이동할 것을 주장했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낮에서 초저녁으로 이동한 영화는, 편집의 순간을 통해 그가 원하던 한 밤의 순간을 모두 삭제하고 낮의 순간으로 점프합니다. 이처럼 영화는 촬영과 편집이란, 영화의 기술적 요소를 모아 시간을 그 자체로 적으로 치환하며 인물을 전방위로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 <1917>은 두 개의 숏으로 보이는 영화이긴 하나 편집점이 없는 영화가 아닙니다. 모든 원테이크 영화가 그렇듯 <1917>의 원테이크 역시 편집의 과정을 통해 다수의 롱테이크를 이어 붙인 원테이크입니다. 따지고 보면 편집의 눈속임 역시 롱테이크 형식의 보조수단이 되며, 시간의 절대성을 강조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결국 촬영이든 편집이든, 달리 말해 시간의 절대성이든 상대성이든, <1917>의 세계 속에서 시간은 고무적인 요소가 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영화에서 진정 중요한 건 시간의 절대성 혹은 상대성이 아니라 시간이란 개념 자체 일지도 모르겠네요.

 


 

" 영웅이 아닌 그대들을 위해 "


  영화의 기술적 요소는 흠잡을 구석이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1917>은 촬영의 부문에서 21세기 영화사에 오래도록 남을 기념비적인 성취를 일궈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러나 영화에 대한 비판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론 기술적 성취로 인해 오히려 기술이 영화보다 더 돋보이는 기믹의 결과물이 나온 게 아니냐는 비판. 둘째는 기술적 성취에 도취되어 이에 연연하느라 서사가 너무 빈약한 것은 아니냐는 비판. 전자의 경우엔 나름의 입장을 말한 것 같으니 후자에 대해서 말할 필요가 있겠네요.
  극 중 불의의 사고로 블레이크가 사망하는 순간, 이에 적지 않게 놀란 사람들이 많으리라 예상해봅니다. 그 이유는 이 영화가 초반에 블레이크를 상대적으로 더 조명해서 그의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이야기의 절반도 오지 않은 시점에서 블레이크가 갑자기 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짐작컨대 이러한 의외성은 <1917>의 의도된 트릭이며 그 의도에 <1917>의 서사에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블레이크가 낮잠을 자고 있는 스코필드에게 같이 임무를 받으러 가자고 한다

  영화는 초반부터 이건 블레이크의 이야기임을 관객에게 명확히 전언합니다. 프레임에 처음 등장하는 인물 역시 스콧필드가 아닌 블레이크이며 카메라는 줄곧 의욕에 찬 블레이크를 따라가며 자연스레 스콧필드를 조연의 자리로 몰아가죠. 무엇보다 블레이크에겐 전쟁영화의 주인공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클리셰 혹은 전형적인 특징이 그대로 있습니다. 블레이크는 훈장의 명예와 권위를 자랑스레 여기는 애국자이며 가족의 소중함과 그리움을 절실히 느끼는 인간적인 인물입니다. 그리고 이번 작전 역시 그는 아군의 안위라는 대의와 함께 자신의 형을 지켜야한다는 개인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지요. 즉 여러모로 그는 주인공이 될 명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주연임을 증명하듯 곧이어 그는 독일군의 참호에서 조연 스콧필드를 구해내며 의로운 영웅이 됩니다.
  반대로 스콧필드는 주인공은커녕 영화에 등장할 이유조차 불분명한 캐릭터라 해도 무방합니다. 명령을 알든 알지 못했든 간에, 자신의 의지로 작전에 투입된 블레이크와 달리 스코필드는 영화의 시작부터 태평하게 낮잠을 청하고 있다가 후에 블레이크의 요청에 따라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작전을 명 받습니다. 그 외에도 영화는 줄곧 스콧필드를 전형적인 주인공 유형의 인물이 아님을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그는 옷자락 내의 가족사진을 꺼내보며 묵상에 잠기는 전쟁영화의 클리셰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길 꺼려하며, 몰래 배급 음식을 빼돌리거나 훈장을 와인 한 병과 맞바꿔먹는 행동을 일삼습니다. 정리하자면, 스코필드는 애국심이 투철한 인물도 아니고 가족에 대한 마음이 그리 애틋하지 않습니다. 그에겐 특별히 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스토리상의 이유도 부재합니다. 따라서 스코필드는 블레이크와 달리 주인공이 될 명분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다들 알다시피 영화의 초중반 부에 목숨을 잃는 건 스콧필드가 아닌 블레이크입니다. 도대체 왜 영화는 스콧필드가 아닌 블레이크를 죽였을까요.

 

 

적군의 파일럿이 불에 타자 블레이크가 먼저 구하려 나서고 스코필드가 뒤를 따른다

  그건 바로 영화가 전쟁을 영웅적 태도가 통하지 않는 부조리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블레이크는 다소 무모하게도 적군의 파일럿을 구출하다가 되려 본인의 목숨을 잃고 말지요. 상투적인 드라마 서사에선 모르겠지만 <1917>이 해석하는 전쟁에서 살아남는 건 적군까지 살리려 힘쓰는 영웅이 아닙니다. 진정 살아남을 수 있는 인물은 훈장과 명예에 집착하지 않고 과감히 이를 술과 맞바꿔 자신의 목을 축이는 이기적이고 융통성 있는 인간입니다. 블레이크가 죽는 순간, 영화는 형을 만나기 위한 블레이크의 영웅 서사에서 아무 목적도 없이 그저 명 받은 임무 하나만 붙들고 있는 스콧필드의 서사로 급전환됩니다. 그렇게 영웅 서사의 전형처럼 보였던 흐름에서 영웅이 허무하게 퇴장하니 이어서 오로지 시간 하나와 사투할 뿐인 인간의 숭고한 서사가 시작됩니다. 

 

 

영화 결말에서 스코필드가 가족사진을 꺼내든다

  우리가 흔히 전쟁영화 장르에서 클리셰로 부르는, 가족사진을 꺼내보는 병사의 장면은 엔딩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등장합니다. 생지옥의 과정을 통과하며 생존의 의미를 체감한 스콧필드는 비로소 가족의 안정된 공간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속에 새기며 그들의 사진을 꺼내보지요. 비록 장면 자체는 클리셰에 가까울지라도 우리는 이런 영화의 엔딩을 클리셰라 여기지 않습니다. 물론 이는 블레이크의 심리적 개연성을 위해 마련된 아이를 키우는 어느 프랑스 여성, 혹은 블레이크의 형제 관계 등과 같은 가족관계적 설정이 깔린 각본 덕이 아니라 생지옥을 생생히 구현한 영화의 기술적 성취의 공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본 영화의 서사와 각본이 뛰어나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영화의 결함은 아닙니다. 온몸으로 부조리의 공간을 통과한 인물의 마음을 영화 결말에서 절절히 느낄 수 있었던 이유엔 분명 영웅 서사를 과감히 버리고 평범한 인간의 서사를 취한 것에 있습니다. <1917>의 이야기가 더욱 뭉클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멋이 나지만 미련한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되 숭고한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한 줄 평가: 아이러니하게도 무자비한 시간을 적으로 돌린 덕에 우린 언제나 질문에 맞선 해답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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